내 인생은 실패한 게 아니라, '반증'되었을 뿐이다

폐허가 된 삶에서 칼 포퍼를 만나다

by 고도

379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도서관에서 책장을 넘기다가, 나는 379페이지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단톡방을 나오고, 관계를 정리하고 나니 내 하루는 갑자기 '너무 조용한' 것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알림은 분명 해방이었는데, 해방은 곧 공허로 변했다. 10년간 쌓아온 커리어와 인간관계가 휩쓸려간 자리. 성실하면 된다는 믿음도, 동료는 자산이라는 가설도, 노력하면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남은 것이라곤 안식년을 위해 배정해 둔 5,000만 원이라는 예산과, 처치 곤란할 정도로 텅 빈 하루, 그리고 여전히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뿐이었다. 그 황량함을 견디기 힘들어 나는 도망치듯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서 만난 촌스러운 구원

세상의 소음을 피해 숨어든 그곳에서, 나는 우연히 촌스러운 표지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추측과 논박 (Conjectures and Refutations)』 제목부터가 뼛속까지 엔지니어인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무심코 책을 넘기던 나는 379페이지에서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우리는 가설을 갖고 자연과 대결해야만 하며, 우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요구해야만 한다."


실패가 아니라 데이터다

칼 포퍼는 책을 통해 내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자네의 인생이 무너진 건 자네가 실패해서가 아닐세. 자네가 세운 '가설'이 틀렸음이 현실에서 입증(반증)되었을 뿐이야."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내 인생의 고통을 '실패'라고 불렀다. 그래서 괴로워했고, 자책했고,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하지만 냉정한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실패가 아니다. 이것은 '데이터'다.

"성실하게 일하면 조직이 나를 끝까지 책임져 줄 것이다"라는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아주 값비싼 실험 데이터일 뿐이다.


과학자는 실험이 망했다고 울지 않는다

생각해 보자. 과학자는 실험 결과가 예상과 다르게 나왔다고 해서 울지 않는다. "아, 내가 못난 과학자라서 실험이 망했어"라고 자책하며 연구실을 때려치우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데이터를 분석한다. "왜 가설이 틀렸지? 변수가 뭐였지?" 그리고 가설을 수정해서 다시 실험을 설계한다.

그렇다면 나도 울 필요가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라는 실험실의 가설을 수정하는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일기장에 썼다.

"내 인생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가설이 반증되었을 뿐이다."


폐허는 곧 '빈 땅'이다

이제 보니 폐허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잘못된 설계도로 지어진 건물을 모두 허물어버린 아주 깨끗한 빈 땅. 이제 이곳에 어떤 새로운 가설을 세울 것인가?

나는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황 때문에 뛰는 심장이 아니었다. 새로운 실험을 앞둔 엔지니어의 본능적인 설렘이었다.

이전 04화단톡방에서 퇴장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