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초보가 지리산에서 고수로 인정받은 방법

지리산 서북능선

by 푸른치타
코스정보 : 성삼재-고리봉-만복대-정령치-세걸산-부운치-팔랑치-바래봉-허브밸리 주차장


산방기간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한 건 지리산행 안내버스 예약이었다. 처음 끌렸던 건 바래봉만 왕복하는 코스였다. 길이 정비가 잘 되어 있고 5월엔 철쭉 군락지에서 축제가 예정되어 있기에 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약을 마치고 살펴보니 다른 코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눈에 들어온 건 ‘서북능선 종주’. 지리산은 처음이라서 정신없이 장거리 산행을 하기보다는 천천히 즐길 수 있도록 바래봉만 가려했으나, 나도 모르게 자꾸 서북능선 종주 후기를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만복대 일출 사진을 보았고, 홀린 듯 서북능선 종주 버스를 예약해 버렸다. 서북능선 코스에 바래봉이 포함되어 있으니 기왕이면 바래봉만 가는 것보다 능선까지 타는 게 좋겠다며 합리화했다. 지리산 서북능선 종주는 총 거리 22km로 ‘성삼재-고리봉-만복대-정령치-세걸산-부운치-팔랑치-바래봉-허브밸리 주차장’으로 이어진다. 가파르거나 험한 길은 아니라서 길만 보면 평이하지만 장거리라서 난이도가 있다.


내가 탄 안내버스는 밤 11시에 출발하여 새벽 3시부터 성삼재에서 시작하는 스케줄이다. 성삼재에서 내렸을 땐 구름이 많이 껴서 그런지 별도, 달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초행길이고, 일출 산행도 처음이라서 같은 버스를 탄 사람 중에 앞서가는 사람이 보이면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렸을 땐 아무도 앞서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 휴게소나 화장실로 흩어졌고, 그 외 남은 소수 인원은 나처럼 누군가를 따라갈 생각으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결국 성격 급한 내가 먼저 출발했고, 두 명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두운 등산로를 오르며 찍은 사진


랜턴으로 비추는 근거리 말고는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길이 좁고 양옆에 나무, 풀이 많이 자라서 조심조심 올라갔다. 갈림길이 거의 없어서 쭉 가기만 하면 되니까 길은 어렵지 않았고, 얼마 오르지 않아서 고리봉이 나왔다. 야경을 잠깐 감상했지만 딱히 보이는 게 없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올라가는 길엔 처음 내 뒤를 따라오던 두 명에 이어 다른 이들까지 합류했다.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게 된 셈이다. 가끔 나를 제치고 앞서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른 때라면 뒤에 사람이 따라오든 말든 상관이 없겠지만 이 날은 난감했다. 공복운동이 안 맞아서 든든한 출발을 위한답시고 야식을 먹은 게 문제였다. 속에서 부글거리며 가스가 차더니 점점 밖으로 나오려고 안달이었다. 소리는 안 들리게 할 수 있지만 냄새는 감출 수가 없기에 참느라 미칠 지경이었다.


고리봉에서 그나마 터가 넓기에 사진을 찍는 척 떨어져 잠시 해방의 시간을 가졌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또 신호가 왔다. 이동 거리가 길어지니 뒤쳐지거나 쉬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뒤따라오는 사람 수가 줄었으나 처음 2명은 계속 바싹 따라왔다. 신발끈을 고치는 척 빠지려 해도 내 속내를 모르고 앞서지 않은 채 서로 사이좋게 대화까지 하며 나를 기다렸다.


남은 전략은 한 가지뿐이었다. 거리가 벌어질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 이를 꽉 깨물고 속도를 높였더니 두 사람도 악착같이 나를 쫓아왔다. 설마 했는데 나를 길잡이로 잡고 계속 뒤따라갈 셈이었던 것이다.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심정으로 미친 듯이 올라가다 보니 서서히 격차가 벌어졌다. 인적이 거의 없고 조용해서 두 사람과 멀어져도 대화 소리가 잘 들렸다. 둘 다 서북능선이 처음이지만 지리산 다른 코스를 몇 번 가봤다고 하더니 대화 주제가 내 얘기로 넘어갔다. 나보고 정말 등산을 잘한다고, 본인들도 웬만큼 산을 타는데 내가 너무 빠르다며 혀를 내두르더라. 멀어지는 대화소리를 들으며 괄약근은 비로소 평화를 되찾았다.


지리산 만복대
만복대에서 찍은 전경


만복대에 도착하니 4시 50분, 그리고 일출 예상 시간은 5시 30분. 5월 초였지만 얼마 전까지 비가 내려 기온이 떨어지기도 했고, 고도가 높아서 찬바람이 세게 불었다. 일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고, 기다리자니 너무 추워서 고민하던 중에 두 사람도 만복대에 도착했다. 한 명이 나보고 지리산 몇 번 와봤냐 묻길래 처음이라 답했더니 놀라는 눈치였다. 산을 정말 잘 탄다고 감탄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만복대에서 본 여명


예상대로 둘은 내가 계속 길잡이 역할을 해주길 바랐던 게 맞았다. 추워서 일출 못 기다리겠다며 같이 출발하자는 식으로 자꾸 나를 떠보려 했다. 서울에 있는 산이라면 미련 없이 떠났겠지만, 이번 코스는 만복대 일출을 보고 싶어서 결정한 종주였다. 깜깜한 모습만 보다가 그냥 가기엔 너무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아무리 춥다고 한들 얼어 죽지는 않겠지 싶어서 남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두 사람을 보냈다.


산행하며 찍은 일출 사진


40분 가까이 찬바람에 맞서 초콜릿을 먹어가며 버텼다. 기다리는 동안 다른 등산객들 인증샷을 찍어주기도 하고, 내 사진도 부탁드리고 하다 보니 시간이 은근히 빨리 지나갔다. 하늘에 빨간빛이 퍼지면서 랜턴이 없어도 시야가 잘 보이기 시작했다. 점차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출발 전 후기에서 본 사진들도 멋졌지만 역시 실제로 볼 때 느껴지는 감동과 전율은 달랐다.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며 정령치로 이동했다. 정령치는 자동차로도 올라올 수 있는 고개지만 주차된 차량은 거의 없었다. 정령치를 지나니까 등산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북능선 종주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후기를 봤는데 진짜였나 보다.


정령치를 지나가며 찍은 사진들
세걸산에서 찍은 주변 풍경


세걸산을 지나 바래봉 근처에 있는 팔랑치에 가까워지기 전까지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중간중간 반달가슴곰을 마주칠 때 대처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플래카드가 있었기에 풀숲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면 괜히 신경 쓰였으나, 오래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무뎌졌다. 장거리 코스였지만 탁 트인 구간도 많아서 경관을 감상할 수 있으니 지루하지 않았다. 날씨는 흐렸다가 맑았다가 반복해서 움직이기에 최적이었다.


팔랑치에 가까워지자 바래봉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철쭉 군락지를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 행군 훈련하는 군인들이 있었다. 아직 꽃이 덜 피었지만 철쭉의 색감이 중간중간 곁들여진 지리산의 모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축제기간이었지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다들 꽃이 덜 피었을 거라 생각했는지 어린이날 연휴임에도 생각보다 붐비지 않았다.



철쭉 군락지엔 전문 장비를 가져와서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스팟을 발견했는데 마침 그곳에서 카메라를 지닌 할아버지가 있었다. 꽃을 찍다가 할머니에게 포즈를 취해보라며 지시하는 모습에서 장인 포스가 느껴졌다. 촬영을 멈췄을 때 할아버지께 사진을 부탁하니 흔쾌히 좋다고 하셔서 냉큼 핸드폰을 맡겼다. 울타리 때문에 거리가 가까워서 사진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시면서도 심혈을 기울이며 구도를 잡고 찍으셨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다른 스팟을 찾아 이동하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확인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찍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진은 이상했다. 머리와 상체는 거대하게, 하체는 짧고 튼실하게 왜곡되어서 크롭이든 보정이든 전혀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할아버지께서 찍어주신 사진을 보고 착잡한 마음으로 올렸던 스토리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마저 꽃구경을 했다. 지나가다 마주친 사람들에게 한 번씩 사진 부탁을 했는데, 충격요법 덕분인지 어떤 사진이든 나쁘지 않게 보였다. 바래봉에 올라가서 인증샷을 남기고 허브밸리 주차장 방향으로 향했다.



바래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안내버스에서 제공한 정보에 임도라고 나왔기에 편할 줄 알았으나 착각이었다. 경사는 완만하지만 구간의 절반 이상은 돌이 쫙 깔려있었다. 허브밸리 주차장에서 왕복했다면 나쁘지 않겠지만 20km 가까이 걸은 상태에서는 발목이랑 무릎이 아파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능선길에서 주야장천 마주한 흙길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힘들고 아파서 표정이 일그러진 채로 내려가는데 불경을 틀어놓고 시주하는 스님이 보였다. 험악한 표정으로 눈 마주치면 안 좋게 보는 사람으로 오해를 살 것 같아서 일부러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려 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눈에 띄었는지 스님께서 “힘들죠? 조금만 더 가면 돼요.”라며 응원의 말을 건네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주차장이 가까워지자 돌길이 끝나고 흙길과 아스팔트가 공존하는 길이 나와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창가 테이블에 착석했다.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더니 점점 많이 내렸고, 비를 피하기 위해 카페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조금만 늦었으면 비를 쫄딱 맞고 자리도 못 잡았을 텐데 운이 따라줬다. 여러 해프닝이 있었지만 즐거운 추억으로 남은 산행이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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