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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라는
국가의 창세기 신화에 관한 성찰(2)

역사이야기>- 이용기의 한국근현대사 다시 읽기 (끝)

≫ 이용기 |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4. ‘인공 치하’의 민중


만반의 준비 끝에 전쟁을 도발한 북한은 순식간에 남한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일부 지역에서 국군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고 신속하게 미군이 개입하였지만,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초에는 낙동강 근처에 이르렀다. 이로써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남한의 거의 모든 지역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이 지역 주민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9월 말까지 원하든 원치 않든 ‘인민공화국’ 통치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남한 지역을 점령한 북한은 가장 먼저 인민위원회 복구에 나섰다. 북한의 발표에 의하면, 9개 도의 점령 지역에서 103개 군, 1,186개 면, 13,654개 리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민군 점령하에서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민중의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구조적 강제 속에서 이루어졌고, 대부분은 생존을 위한 선택 차원에서 이에 대응하였다. 김성칠은 동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맡는 게 좋을지 상의하러 왔던 같은 집안 사람이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판단 기준에서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대한민국이 옳으냐, 인민공화국이 바르냐” 따라서 “대한민국을 따르느냐, 인민공화국을 좇느냐” 하는 확고부동한 태도가 서 있지 않고, 결국은 어느 쪽이 이길 것이냐, 그럼 어느 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냐, 그보다도 당장 어느 쪽인 척해두는 것이 우선 위험도 모면하고 나중에 가서도 말썽이 없을 것이냐. (김성칠, 1950.7.14.) 

대부분의 한반도 주민들은 전쟁 상황에서도 특정한 이념이나 어느 한쪽의 국가 또는 체제를 선호하여 행동하기보다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그때마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것인가를 선택하였다. 김동춘은 이런 모습을 ‘민중의 기회주의’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민중을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영토 내에서 섬겨야 할 국가가 계속 바뀌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양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모습’”이라는 의미였다.2)  다시 말하면 ‘민중의 기회주의’는 민중 자신의 불철저한 자화상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적대적인 두 국가의 폭력에 대처하는 민중의 생존 전략인 셈이었다. 


2) 김동춘, 2000, �전쟁과 사회�, 돌베개, 28쪽.




이러한 양상은 약간씩 변주될지언정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났다. 중도적 지식인 김성칠의 경우에는 남북 모두에 거리를 두고 은인자중하는 방식을 선택하였으며, 우파 성향의 대학생 강신항조차 생존을 위해서는 인민공화국의 통치에 참여하는 길을 걸었다. 전쟁 발발 직후 피난길에 나섰던 강신항은 연거푸 국군이 패주하자 인공 치하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 청년들이 좌익 조직인 ‘민주학련’에 가입하라고 종용하자 이를 거부하면 반동분자로 몰릴까 우려하여 여기에 참여키로 작심하고선 자신의 변신을 다음과 같이 스스로 합리화하였다. 


그들이 나를 ‘동무’로 부른다. 이 사실 하나만 하더라도 나로서는 일대혁명이었다. 과거 회색분자로서 비겁한 길을 걸어오던 나, 배움의 길에 있다고, 모든 청년에서 볼 수 있는 씩씩한 기개라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1950년 7월 21일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청년이 된 셈이다. 이는 일대혁명이다. (중략) 비웃을 자, 비웃어라. 나는 나의 갈 길을 가련다. (강신항,1950.7.21.)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강신항은 짧은 기간이나마 자신이 인공에 협조했던 것을 후회하였지만, 우리는 위와 같은 다짐의 글 속에서 오히려 생존을 위해 변신(또는 변신한 척)할 수밖에 없었던 우파 청년의 고뇌와 좌절감을 엿볼 수 있다. 전쟁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이념 그 너머에 있었던 것이다.     


북한 정권은 점령 지역 남한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북한의 남한 점령정책은 당근과 채찍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 토지개혁이 당근의 대표적 사례였다면 의용군 모집은 채찍의 핵심 중 하나였다. 북한 정권은 ‘남조선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남한 점령을 합리화하였으며, 1946년에 북한에서 시행했던 토지개혁, 8시간 노동제, 남녀평등법 등 일련의 ‘민주개혁’을 남한 점령 지역에서도 실시하였다. 그것은 일부에게는 전쟁이 주는 떡고물로 비쳐질 수도 있었겠지만, 유동적인 전황 속에서 민중은 그것의 실제적 효용성을 크게 실감하기 어려웠다.     


이즈음 신문에는 노동법령의 실시를 가지고 판을 짜고 있다. (중략) 법령으로선 취할 점이 많으나 대체 토지개혁이고 노동법령이고 간에 무엇이 시급해서 이토록 초조하게 덤비는 것인지 우리는 이해할 길이 없다. (중략) 신문에서 흔히 선전되는 바와 같이 진정으로 “땅을 얻었으니까 내 아들을 싸움의 마당으로 내보내겠다”는 것인가. (중략) 날마다 찾아오는 미국 비행기를 보고 땅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김성칠, 1950.8.27.) 


김성칠은 이러한 정책들이 그 자체로서는 “취할 점이 많”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는 “내 아들을 싸움의 마당으로 내보내겠다”는 분위기를 만들려는 것, 즉 남한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징발하기 위한 정지 작업임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다. 또한 그는 미군의 개입에 따라 전세가 역전될 가능성을 감지한 민중이 이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전해준다. 민중은 북한이 구사하는 당근과 채찍의 양면 전술 속에서 때로는 희망을 보고 때로는 공포를 느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어느 한쪽의 승리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막중한 전시 동원의 부담과 빈번한 사상교육 등에 지쳐갔다.


사람들은 모두 겉으로 티내어 말하지는 아니하나 속으로는 거의 전부가 공산주의를 외면하게 되었다. (중략) 첫째는 그들의 그 입버릇처럼 인민을 위한다는 정치가 일마다 인민에게 너무 각박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미군이 참전하고 그 폭격이 우심해지자 세상은 멀지 않아 반드시 번복하고야 말리라는 추측에서이다. (김성칠, 1950.8.19.) 


필자가 농촌의 노인 분들께 ‘인공 치하’의 경험을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매일 같이 회의가 열려 질렸다는 것과 토지개혁 때 평당 수확고를 파악하기 위해 낱알까지 셌다는 것 등이었다. 실제로 인공 치하에서는 인민위원회, 치안대, 농촌위원회, 여성동맹, 청년동맹 등 다양한 조직이 마을 차원까지 촘촘하게 조직되었고, 각종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민 사상교육을 위해 여러 조직 단위에서 회의를 많이 했다. 그래서 노인들은 ‘빨갱이는 회의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고까지 말하곤 했다. 또 평당 수확고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 낱알까지 센 것이 토지개혁의 공정성을 기하려는 의도에서라 할지라도, 농민들이라면 누구나 경험적·감각적으로 알고 있는 일종의 민중적 상식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객관적’ 조사 방식은 농민들에게 낯설기도 하고 심지어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것들이 바로 김성칠이 전해주는 “너무 각박”한 인공의 통치 방식이었다.


당근의 댓가로 요구한 의용군 징발은 남한 민중에게 커다란 고통이었다. 북한은 전쟁 개시 직후부터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남한 청년들에게 의용군에 자원입대하라고 요구하였다. 의용군으로 입대한 남한 청년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20만 명 정도로 추산될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이들은 모두 강제 징집된 것은 아니었고,3)  게 중에는 남한 정권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좌파 성향의 청년이나 ‘전향의 죄과’를 씻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한 보도연맹원 등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북한·좌익 세력이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자원입대 캠페인이나 지역별 할당제에 따른 사회적 압력 등의 구조적 강제로 인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끌려간 청년들은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최전선에 배치되어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3)강신항도 고향에 머물던 중 의용군에 지원할 의사가 있는지 조사할 때 “나는 ‘No’라고 대답하였다.”고 일기에 적었다(1950.8.24.).




마을에서 의용군으로 나갔던 청년들이 벌써 부상병이 되어가지고 여러 사람 돌아왔다. (중략) 부상병들이 와서 공언하지는 않으나 그 가족과 친지들에게만 은밀히 한 이야기가 새어나온 것을 들으면, 지금 일선은 사람과 기계가 싸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어떠한 새로운 국면의 타개가 없으면 도저히 지탱해나갈 수 없으리라 한다. (중략) 대체 어찌할 양으로 고귀한 인명을 무한정 미군의 대포밥을 만드느냐는 공분의 소리를 듣게 된다. (김성칠, 1950.9.3.)
인민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목숨과 죽음을 요구하는 이들 모든 모집에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지 그 의의를 모르고 있다. 왜 죽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하여? (중략) 인민공화국을 위해서 죽으라 한다. 덮어놓고 죽기만 한다면, 인민의 나라는 오는 것인가. 근대 무기 앞에 맨손을 들고 대항하는 어리석은 항쟁. 인민들은 개죽음임을 알고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강신항, 1950.8.31.)     


김성칠과 강신항의 일기에는 미군의 대규모 화력전에 희생되어 가는 인민군과 의용군에 대한 애틋하고 절절한 동정심이 여러 번 나타난다. 강신항은 “현대 최신식 무기 앞에 소총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맨주먹의 인민군이나 의용군이 어떻게 싸우느냐 말이다.”며 자기 또래 젊은이들의 “개죽음”을 한탄하였다. 김성칠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당한 인민군들이 마포 시가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선 같은 민족의 청년들 앞에 펼쳐질 비극적인 운명을 이렇게 슬퍼하였다.


미워질래야 미워질 수 없는, 아무리 하여도 내 동생이나 조카들처럼 밖에 여겨지지 않는 순진무구한 저 청년들이 다만 그릇된 지도자들을 만났음으로 말미암아 괴나리봇짐에 하잘 것 없는 소총 한 자루와 초라한 삽 한 자루씩을 들고 나가서 고도로 발달된 미군 기계화 부대와 부딪혀서 그 대포알 밥이 될 것을 생각하니 다락 위에 누워 있는 내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진다. (김성칠, 1950.9.20.)


‘인공 치하’에서 민중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주인’에게 복종해야 했고, 심지어 자신이나 자식의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때도 있었다. 또 때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군의 공습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을 다녀야 했다. 그래서 김성칠은 인공 치하가 끝나갈 무렵에 “이 땅의 백성질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라고 한탄하였다. 이처럼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민중에게 1950년 가을 인민군의 패주와 국군의 수복은 또 다른 고통과 재앙으로 다가온다.     



5. 수복 후 적반하장의 국가


1950년 9월 15일 극비리에 이루어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병력 대부분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던 인민군은 후방에서 허를 찔리자 순식간에 대오가 무너졌고, 북쪽을 향한 기나긴 후퇴 길에 올랐다. 유엔군은 서울 진입을 저지하는 인민군의 필사적인 저항을 제압하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다. 이로써 남한 민중은 ‘인공 치하’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에게 다시 다가온 대한민국은 석 달 전의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개전 직후 국민을 ‘적지’에 남기고 홀연히 전장을 빠져나갔던 이승만은 수복 후에도 국민에게 이에 대한 한 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국가를 책임지는 지도자라면, 개전 직후 급박한 상황에서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국민을 적지에서 고생토록 한 것에 사과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이제부터라도 합심하여 전쟁에 임하자고 호소하는 것이 상식에 부합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수복 후에 국회가 수도 사수 결의를 이행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승만은 자신의 과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무책임의 정치’에서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서 ‘도강파’와 ‘잔류파’라는 구분을 만들며 ‘적반하장의 정치’를 감행하였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도강파(渡江派)’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을 건너 인공 치하를 탈출한 사람들로서 대한민국에 목숨 걸고 충성하는 애국자이며, ‘잔류파(殘留派)’는 인민군이 내려오고 있음에도 탈출하지 않고 현지에 남은 사람들로서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자였다. 개전 직후 국가는 인민군의 남침을 물리치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고 현재의 위치와 직장을 사수하라고 요구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 국가의 말을 들은 사람은 의심스러운 자들이고, 국가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자가 된 것이다. 더구나 국가는 의심스러운 자로 분류한 잔류파를 잠재적 ‘빨갱이’로 규정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부역자(附逆者) 심판에 나섰다. 이러한 적반하장의 정치에 대한 원통한 심정은 김성칠과 강신항의 일기에서 절절하게 표현되고 있다.


인공국(人共國) 시절에 ‘계속 남진중(南進中)’이란 말이 웃음거리로 유행하더니 지금은 ‘남하’란 말이 세도가 당당하게 씌어지고 있다. (중략) 정부는 ‘남하’하고 모당(謀黨)은 국민을 포탄 속에 속여서 내버려 두고 당원끼리만 비밀로 연락하여 ‘남하’를 권면하였다 하고 (중략)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약삭빠르게 피란하여 (중략) 이른바 ‘정부를 따라 남하한’ 것이 되고 (중략)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서울시민의 99% 이상)은 정부의 말만 믿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가 갑자기 적군(赤軍)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 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 있은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 하여 곤박(困迫)이 자심하니 고금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있을 것인가. (중략)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 (김성칠, 1950.10.16.) 


김성칠은 “정부의 말만 믿고” 있다가 인공 치하에서 고통을 받은 국민, 즉 잔류파가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맞이하였지만, 자신들을 모두 “불순분자”로 취급하며 핍박하는 것에 억울하였다. 그리고 “약삭빠르게 피란”했던 자들이 오히려 추상같은 호령을 내리는 것에 대해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라고 비꼬았다. 또 그는 위 기록을 남긴 바로 전날의 일기에서, 자신이 겪은 부역자 심사 과정이 “사표(師表)로서의 프라이드를 짓밟아버리”는 “인간의 평가절하”였다고 자탄하였다. 이러한 적반하장식의 부역자 심판은 연말까지도 계속되었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이란 모두가 정부에게 버림을 받고 불가항력은 큰 세력이 덮쳐와서 세상이 아주 뒤집혀지매 그 나라 백성인 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뿐이다. (중략) “석 달 동안 굶주리고 들볶이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해서 얼마나 애쓰이고 괴로웠었소··· 어찌어찌하다 보니 우리만 모면하게 되어서 참으로 면목이 없소이다” 하고 위로하여주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워주지는 못할망정, “우리들만이 진정한 애국자이고 깨끗한 사람들이다. 너희들은 많건 적건 정도의 차이지, 얼마쯤 부역하지 않은 자 없을 것이다” 하는 고압적인 태도로 나오고 그들을 심사 처단하기에 모든 정력과 시간을 기울여 다른 일은 돌볼 겨를이 없는 것 같다. (김성칠, 1950.12.11.)


고향에서 피치 못하여 민주학련 일을 했던 강신항은 수복 직후 우파 성향을 인정받아 별 탈 없이 대한민국의 치안유지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도 부역자 심판은 가혹하고 억울하게 느껴졌다.     


누구를 막론하고, 괴뢰치하에서, 적어도 그 정치를 받은 사람은, 많건 적건 간에 충신 노릇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죽지 않고 살았다는 사람은 모두 죄인이다. (중략) 그러나 요점은 그 죄상의 경중이다. 또다시 대한민국이 찾아오고, 자유의 나라가 왔다. 그래서 이 죄인들을 모두 처단하여야 마땅한가. 7월 초에 우리가 당한 처지와 사정도 참작하지 않고, 이 죄인들은 모두 죽어야 하고 처단하여야 하는 것인가. (중략) 요새 당국에서 하는 처사를 볼 것 같으면, 약간의 공포증조차 아니 느낄 수 없는 형편이다. (강신항, 1950.10.20.)


고생은 고생대로, 고생은 받을 대로, 겪을 대로 겪은 나로서, 아니다. 비단 나뿐이 아니라 거의 전부가, 남하하지 못한 죄인으로 자칫하면 의심을 받는다. 심사를 한다고 야단이다. (중략) 인공국이라는 강압정치를 자행하던 그놈들의 압제 하에서는 압제 하대로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늘 감시를 받아오고, 생명의 위협을 받아오다가, 이제 우리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니, 또 남하 못한 죄인으로서 자칫하면 기분 나쁜 일을 당한다. (강신항, 1950.11.1.)     


강신항은 자신을 포함하여 인공 치하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원하지 않았더라도 인공에 협조해야 했기 때문에 “모두 죄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상황을 참작하지 않고 죄인들을 무지막지하게 처벌하는 대한민국의 처사에 “공포증”을 느꼈다. 또 인공 치하에서 ‘반동분자’로 찍혔던 그조차 남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는 것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김성칠이나 강신항이 겪었던 수복 후의 억울함이나 공포감은 개전 직후 피난을 가지 않았던 또는 가지 못했던 대부분의 남한 민중이 겪어야 했다. 가혹한 부역자 심판의 회오리 속에 많은 사람이 처형을 당하였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해도 ‘빨갱이’로 몰려 고통받았던 경험은 씻기 힘든 트라우마로 몸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인공 치하에서 강신항과 마찬가지로 좌익 청년 조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대학생 박완서는 수복 후 대한민국이 보여주었던 적반하장의 모습과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꾀어 놓고 떠난 사람들 같지 않게 안하무인이었다. 어쩌면 자기 잘못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선수를 치느라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도 잘 참작해 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 같던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중략) 나는 끊임없이 끌려다녀야 했다. (중략) 그들은 나를 빨갱이 년이라고 불렀다. 빨갱이고 빨갱이 년이고 간에 그 물만 들었다 하면 사람도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영장이고 나발이고 인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중략)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다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돼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중략)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박완서, 253~255쪽)


6. 국가에 대한 성찰


짧게 보면 개전 직후의 3일, 길게 보아도 수복 직후까지의 3개월 정도 동안에 보였던 대한민국의 태도는 한국전쟁 시기에 형성되는 국가와 국민(민중)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전쟁 발발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국민을 믿지 못하고 국민을 기만하였으며, 결국에는 ‘국민을 저버린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국민은 국가의 말을 믿고 현지에 남아 ‘인공 치하’를 온몸으로 버텨냈지만, 수복 이후 대한민국은 국가를 믿었던 그 국민을 꾸짖고 의심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무책임과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한 선제적 역공세이기도 하고,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던 국가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또한 전쟁 초기에 보여준 대한민국의 모습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사실은 이승만 정권이겠지만)의 안전을 위해서는 국민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논리와 연결된다. 이로써 국가는 절대화되며 ‘국민 위에 군림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세팅된 국가주의적 방식의 국가-국민 관계는 한국전쟁 시기에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과도 연결된다. 한국전쟁 시기에 민간인 희생은 작전 수행 과정에서의 피해, 부역자 또는 반동분자 심판을 통한 처형, 수 차례 뒤집히는 전세 속에서 상호보복적 학살 등 다양한 요인으로 발생하였다.4)  남한에만 한정하더라도 민간인 희생자가 적게는 약 50만 명에서 많게는 약 1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가공할 만한 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였다. 여기에서 이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겨를은 없지만, 왜 남한 민중의 상당수가 대한민국의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4)김동춘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을 작전으로서의 학살, 처형으로서의 학살, 보복으로서의 학살로 유형화한다. 그도 언급했듯이 이 세 유형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데, 필자는 이 모두의 배후에는 국가폭력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의 본질은 ‘공포를 통한 국민 만들기’라고 판단한다. 남과 북 두 정권은 형식적으로 국가를 수립했음에도 전민족적인 지지는커녕 아직 자기 영역 안의 주민들조차 국가에 대한 소속감과 애정을 갖는 ‘국민’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국가 성립 초기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분단 정부라는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경쟁하는 두 국가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면서 국민적 정체성과 통합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남한으로 말하자면, 반공국가 건설 과정에서 장애가 되거나 의심스러운 자들은 ‘적’으로 설정하여 잔혹하게 대처함으로써 모든 국민에게 국가의 위엄을 과시하고 국가에 대한 공포감과 무조건적 복종심을 갖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중간은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적’과 ‘아’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자는 곧 ‘의심스러운 자’이며, ‘의심스러운 자’는 적에게 붙을 수 있는 자(부역자=빨갱이)이므로 제거되어 마땅했다. 이제 자신이 대한민국 국민인지 인민공화국 국민인지 모르거나 또는 어떻게 되어도 별 상관이 없다는 사람,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을 모두 탐탁지 않게 여기거나 거꾸로 둘 다 동족으로 여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용납되지 않았다. 오직 대한민국에 대한 절대적·배타적 지지와 충성을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이 자기 국민을 만들어내어 ‘국가다움’을 갖추어가는 창세기에 해당하며, 그것은 폭력을 통한 국민 만들기로 얼룩졌다. 대한민국이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국민에게 ‘국가는 나의 삶’이 되었다. 국민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과 절대적 충성을 요구받았고, 국가는 개인과 국민에 우선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그 무엇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전쟁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은 단지 탈맥락적으로 평화를 염원하기 위함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약점을 드러내려는 것도 물론 아니다. 이는 폭력적 방식의 국민 만들기를 성찰함으로써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국민의 관계를 상상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만들어가기 위함이다.     


     

<참고문헌>
김동춘, 2000, �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돌베개.
김성칠, 1993,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 창작과비평사.
강신항, 1995, �어느 국어학도의 젊은 날 Ⅰ-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일출판사.
박완서, 1992,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출판.
박명림, 2002,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나남출판.     


‘이용기의 한국근현대사 다시 읽기’는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역사 교사들에게 한국근현대사를 읽고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시선을 열어주신 이용기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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