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야기 >> 역사교사를 위한 영화수업 5화 : <레미제라블>
>>최은(영화평론가)
편집자주] ‘역사교사를 위한 영화 수업’은 2020년 여름 호부터 신설된 코너입니다. 영상 매체를 통하여 역사 수업을 꾸릴 여지를 찾아보기 위해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영화평론가 최은 님께서 필자로 참여해주십니다. 이번 영화 <레 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과 동명으로, 이민자의 도시인 프랑스의 몽페르메유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서커스단의 아기 사자가 사라지면서 사건이 시작되지만, 이 사건은 몽페르메유 안의 불신과 폭력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새로운 사건을 계속 불러옵니다. 사건이 거듭되면서 서로 간 오해는 깊어지고 갈등은 극화됩니다. 영화가 묘사하는 갈등은 오늘날 세계 어디에서나 다른 모습을 하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이러한 갈등과 오해를 풀어줄 명쾌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든 갈등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그러므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영화 속 촘촘하게 묘사된 갈등은 그 사회가 가진 오해를 현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영화는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소. 다만 나쁜 농부가 있을 뿐이오.’라는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 내용을 인용하며 끝을 맺습니다. 이번 원고는 영화 속 갈등에서 드러나는 이주민 문제와 타자화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갈등과 오해의 장이 될 수 있는 역사 수업에서 오해를 이해로 바꾸기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민자 소년에게 가해진 과도한 공권력을 다룬 레쥬 리 감독의 영화 <레미제라블>은 2018년 파리 월드컵에 모인 시민들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소년 ‘이사’가 프랑스 국기를 망토로 두르고 파리 개선문 광장에 도착했어요. 국기를 손에 들고 몸에 걸치고 나선 젊은이들과 수많은 시민이 “프랑스 파이팅!”을 외칩니다. 이사는 특히 ‘음바페’라는 축구선수를 응원했어요. 킬리언 음바페는 카메룬 출신 아버지와 알제리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축구 영웅입니다.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자랑이 된 인물이죠. 축구를 좋아하는 아프리카계 소년 이사에게 음바페는 영웅 이상의 모델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B구역의 꼬마들’ 모두에게 큰 희망이었겠지요.
음바페의 이름은 잠시 후 스테판과 함께 몽페르메유의 재래시장을 순찰하던 형사 크리스에 의해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음바페는 끝났어. 신기루야. 짝퉁이라고. 저것 봐. 여기도 짝퉁 저기도 짝퉁!” 여기 사는 한 희망은 부질없고, 그 모든 것이 허상에 불과하다고 크리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집어넣었던, 파리에 가서 음악을 할 거라고 말하는 한 출소자의 등 뒤로 크리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어요. “곧 다시 잡혀 들어 온다에 한 표.” 위고의 『레미제라블』(1862)에서 가석방되어 출소하는 죄수번호 24601(장발장)에게 자베르가 했던 말이기도 하죠.
법과 질서의 수호자인 경찰이, 그것도 몽페르메유에서 하는 말이라 크리스의 이런 냉소적인 발언은 의미심장합니다. 이곳 몽페르메유에는 ‘빅토르 위고’라는 이름의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이 장소는 테나르디에 부부의 여관방이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팡틴이 딸 코제트를 맡겼던 곳이죠. 스테판은 빅토르 위고를 언급하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로 없나봐.”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비참하고 출구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몽페르메유는 세계 40여 개국의 이주민들이 사는 가난한 동네입니다.
그렇게 보면, 레쥬 리의 <레미제라블>이 오프닝인 월드컵 응원 장면을 톰 후퍼 감독의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2012)의 마지막 장면, 바리케이트에 올라선 혁명군의 모습과 비슷하게 연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겠다 싶습니다. “1815년 - 프랑스 혁명 후 26년”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톰 후퍼의 <레미제라블>은 1832년의 6월 봉기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결국, 하룻밤 만에 실패한 혁명이 되었지만 영화는 수많은 희생을 딛고 ‘그날’은 반드시 올 거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로 마무리됐죠. 2019년 <레미제라블>의 오프닝은 마치 그 엔딩 장면을 이어받은 듯, 개선문 광장에 빼곡히 들어찬 깃발들과 군중 뒤편으로 화염을 닮은 주황색 연막이 뿌옇게 올라오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혁명의 도시 프랑스와 월드컵 축제의 현장을 연결시키고, 프랑스 혁명이 낳은 19세기 도시 풍경을 오늘날의 이민자 거주지와 연결시킨 영화의 화법이었어요. 프랑스 국기를 흔들며 환하게 웃는 이사의 얼굴은 두 시간 이내에 몽페르메유의 허름한 아파트 계단에서 화염병을 들고 서 있는 이사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대체될 예정입니다. 고무탄으로 찢기고 일그러져서 그 얼굴은 이제 웃을 수 없습니다.
결국 레쥬 리의 21세기 <레미제라블>은 오늘날의 프랑스와 이 세계에 반문하는 영화입니다. 월드컵의 열광과 이민자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프랑스의 하나됨은 허상이고,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 정신은 이미 잃어버린 것 아닌가 하고요.
한편 축구는 여기서 또 다른 역사적인 사건을 소환합니다. 2005년 파리 전역에서 약 두 달 300여 채의 건물과 차량 1만여 대가 불타고 3천여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이 초유의 사건은 두 이민자 소년의 죽음으로 촉발된 일이었습니다. 파리 근교 클리시수부아에서 축구경기를 보고 귀가하던 소년들이 경찰이 쫓아오자 영문을 모르고 놀라 달아나다가 변전소의 담을 넘습니다. 그러다가 둘이 감전으로 사망한 거지요. 경찰은 책임을 회피하기 바빴고 그간 축적되었던 이민사회의 분노가 소요사건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레쥬 리 감독은 말리 출신 이민자로 몽페르메유에서 자랐습니다. 파리 소요가 있던 그 시절부터 꾸준히 이민 사회와 빈민의 소외된 현실 그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혐오와 폭력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하고 알려왔습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 증거를 쥐고 있는 소년 뷔즈는 따라서 감독 자신의 모습입니다. 레쥬 리 감독은 자신의 아들 알 하산 리에게 뷔즈 역을 맡겼어요.
사자 도둑 이사가 경찰에 붙잡힐 때도 이사는 동네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와다는 오발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와다는 화가 나 있는 상태였어요. 최루가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고 이사의 친구들이 쫓아와 한꺼번에 공격하는 바람에 분노에 차 있었죠. 하지만 2005년의 경찰이나 지금의 그와다와 크리스 모두 경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지 않고 사건을 은폐하기 바빴습니다. 당시 시민들이 분노하고 소요를 일으킨 것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면, 지금 B구역 아이들이 화가 나서 이사의 복수를 돕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스테판은 이사를 먼저 병원으로 옮겨 살려야 한다고 안절부절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나마 무슬림 형제단의 살라 만이 대화가 가능한 인물이었어요.
살라는 스테판에게 말했어요. “당신들은 무기를 쓸 줄 몰라. 분노를 표현하지 않으면 듣지를 않지.” 스테판은 2005년의 소요사건을 떠올려보라고 살라를 설득합니다. ‘회개한 깡패’ ‘거물’ 또는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고 불리기도 하는 살라는 마약소굴이던 몽페르메유를 정화해서 현재의 치안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데 기여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장발장이나 미리엘 주교처럼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자베르를 닮은 크리스 같은 인물들에 의해 자주 조롱을 받습니다. 특히 ‘시장’이나 건달 ‘뺀치’ 일당에게는 눈엣가시였죠.
여하튼 드론 영상 메모리를 들고 있던 뷔즈는 가장 위급한 순간에 살라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어요. 몽페르메유가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런 부분들입니다. 크리스의 강력반이라는 공권력이 있고, 시장처럼 공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견제하는 형광조끼 선도원들이 있고, 경찰에 기생하는 뺀치의 조직이 있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앞세운 종교집단이 있고, 차라리 무법지대인 유랑자 집시들과 방치된 아이들이 있었죠. 그들은 다급해지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어린 뷔즈가 숨겨달라고 이맘을 찾아가고 경찰이 뷔즈를 찾게 해달라고 뺀치를 찾아가고 B구역의 아이들이 경찰의 폭력을 목격하고 시장을 찾아갔던 것처럼요.
하지만 몽페르메유는 언제라도 약점을 잡아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몰아내고 우위를 점하려는 알력과 긴장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회유와 협박을 통한 공조, 그리고 (법이 아닌) 그들만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쉽게 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아이들이었지요. 예컨대 크리스는 투철한 사명감이나 정의에 관한 신념이란 애초에 포기한 ‘영혼 없는’ 자베르입니다. 스테판이 부임하자마자 선배로부터 들은 충고는 너무 열심히 하지 말 것, 너무 순진하지 말 것, 사과하지도 말라는 것이었어요. 출동할 때마다 완장을 차는 스테판의 반듯함과 성실함은 그들에게 비웃음거리였습니다. 적당히 사악하고 적당히 정의롭고,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이곳에, 시골에서 온 스테판은 말 그대로 외지인이자 ‘이방인’이었습니다.
신임경찰 스테판이 외지인이고 사건 해결의 핵심 인물인 살라와 뷔즈, 그리고 희생자 이사가 모두 프랑스 사회의 이주민이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자크 데리다는 「이방인의 문제: 이방인으로부터 온 문제」(1996)라는 에세이에서 이방인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이방인이 문제가 아니고, 이방인으로부터 우리에게 도달한 문제가 핵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문답 같았던 살라의 질문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라는 사자의 행방을 찾는 스테판에게 “언제부터 인간이 사자를 돌봤나?” “사자가 사냥을 할 수 없나?” 물어요. 사자는 본디 인간이 돌봐야 할 필요가 없는 위엄 있는 동물이라는 거죠. 아기 사자를 서커스단 우리에서 훔쳐내고, 훔친 닭을 그 앞에 풀어놓았던 이사는 그렇다면 살라의 질문에 대한 숨은 응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폭력과 불법과 적당한 타협이 난무하는 몽페르메유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던 살라는 사자도둑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한 이 도시에 이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스테판은 이 엄청난 하루를 마칠 무렵 사건의 가해자인 그와다를 따로 만났어요. 살라가 그랬듯이, 스테판 역시 그와다의 ‘근본’을 건드립니다. “고무탄 총은 오발되지 않아. 그건 실수가 아니었어.” 그와다는 이곳에 온 지 하루도 안 된 네가 뭘 아느냐고 따졌는데요, 이제 그와다 자신의 입으로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강조됩니다. “난 여기서 나고 자랐어. 여기가 우리의 세계야!” 감옥에서 나고 자라 어쩌면 자신이 될 수 있는 최고로 멋지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던 위고의 자베르처럼, 그와다도 몽페르메유의 아프리카계 이민자 출신으로 경찰이 된 거였죠. 한때 그와다 자신도 그 세계의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와다는 그 때문에 뭔가 다른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한때 죄수였던 장발장이 자신을 닮은 다른 사람이 자기 대신 잡혀 들어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도록 차마 내버려 둘 수 없었듯이 말입니다.
스테판은 증거영상이 담긴 메모리 카드를 그와다에게 내밀었어요. “가서 네 할 일을 해.” 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을 팔게 될 가룟 유다에게 했던 말이기도 한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것은 유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지요.
전근 첫날 긴 하루를 보낸 형사와 이민자 소년의 이야기를 마감하며 영화는 엔딩 자막으로 빅토르 위고를 불러냅니다. 출소 후 마들렌 시장으로 살고 있는 장발장이 하는 말이었어요.
“여러분 잘 기억해 두시오.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소. 다만 나쁜 농부만 있을 뿐이오.” - 『레미제라블 1』(민음사, 297쪽)
위고의 작품에서 자베르의 집요함이 그가 악당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듯이, 스테판은 물론이고 크리스도 그와다도, 시장이나 이사도 제각기 자신들의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고 타고난 악당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아빠였고 형이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냉소와 무력감으로 타협하고 포기하면서 가장 약한 이들에게 폭력을 대물림하는 것이 마땅한 일은 아닙니다. 레쥬 리의 영화 <레미제라블>은 카메라를 든 소년 뷔즈와 메모리를 지닌 청년 그와다를 통해, 출구가 없어 보이는 세상에도 아직 방법은 있다고 알려옵니다. 열심히 기록해서 진실을 전하고, 고백하고 사죄하는 것. 몽페르메유의 진짜 희망은 음바페 같은 ‘신기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둘에게 있다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다만 뷔즈의 카메라와 그와다의 메모리가 제 역할을 하려면,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진 소년 이사가 들고 있는 화염병과 겁에 질린 스테판이 들고 있는 권총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겠지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에 없이 충격적인 방식으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그와다가 자신의 이방인 시절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것 이상으로, 이사와 스테판 중 누가 어떤 ‘환대’의 경험(또는 환대를 거부당한 경험)을 먼저 떠올려내는지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그리하여 다시, 이사의 얼굴을 생각합니다. 적당한 타협과 공존이 최상의 처세술이고 대다수가 침묵하는 은밀한 법칙이 작동하는 곳이라면 우리 사는 어디나 몽페르메유 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렇다면 검고 흉측해서, 또는 우리의 실수나 오류를 폭로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가장 외면하고 싶은 그 얼굴이야말로 우리에게 구원은 아닐까요. 에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은 우리가 우리 한계를 넘어서 초월을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라고 말했어요. 우리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도저히 긍정할 수 없는 타자를 환대함으로써 우리가 비로소 우리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방인과 타자가 지닌 비밀이고 역설입니다. 물론 그 환대에는 그들이 던지는 뜻밖의 질문을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고 성실히 답해나가는 겸허함이 포함되어야겠지요.
우리에게 혹시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주는 것’ 또는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출구 없는 악의 대물림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는 신의 얼굴이자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요컨대 오늘도 큰 문제 없이, 손해 보지 않을 만큼 적당히 평화롭게 이 세계가 유지되기만을 바라는 우리에게는 이방인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몽페르메유를 당황하게 하는, 천진하리만큼 근본적인 질문을 지닌 낯선 얼굴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