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콩 선생이 만난 팔도 역사교사 12
>> 장용준(前 전남 함평고 교사)
☞ 왜 열두 번째 인터뷰이로 ‘김애경’을 선정했는가?
‘회복적 생활 교육’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김애경은 교사란 칭호 앞에 ‘열혈’이 반드시 붙어야 한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러하다. 언제 어디서 만나건, 친근하면서 호탕하고 매사 기운차다. 숙박을 함께하는 모임 연수에서 새벽 시간대에 집안 가득 울려 퍼지는 호탕한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거의 100% 김애경이다.(물론 남 샘이라면 한 사람 더 있긴 하다.)
그런 그에게도 고민거리는 있으려니 짐작하며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하늘에 뜬 구름처럼 느껴지는 ‘회복적 생활 교육’의 실체를 알아볼 생각이 가장 컸지만, 인터뷰를 하다보면 좀 더 다른 이야기도 진행시킬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대체나 여러 이야기를 진행하다보니, 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김 선생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인터뷰는 성공작일 성 싶다.
그러네요. 벌써 한 학기가 다 갔네요. 기말고사 출제하라고 하는 걸 보니깐요.
시험 문제 출제와 수행평가 채점, (기말고사 후에 진행할) 코로나 융합 프로젝트, 역사탐구대회, 4차 인창아카데미, 인문학 에세이대회 심사, 사회탐구 보고서 대회 심사를 다 마쳐야 1학기가 진짜로 끝나겠지만요~ (휴우~~) 1학기가 끝날 일이 까마득해 보이네요. 어서 이 모든 일을 끝낸 여름방학이었으면 좋겠네요.
네~ 제가 좀 그런 편인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는 편이에요. 제가 작년에 건강이 좀 안 좋아서 병가를 냈었는데, 주변 선생님들이 저에게 묻더라고요. “애경 샘은 스트레스 별로 안 받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아프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죠. “아~ 스트레스로 생긴 병은 아니고요. 소화기 계통 질병이에요. 많이 먹어서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오히려 회복적 생활교육이 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는 합니다. “회복적 생활교육 한다면서 왜 저 사람들과의 갈등은 못 풀어요?” “회복적 생활교육 한다면서 왜 비폭력 대화를 사용하지 않고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요?” 뭐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듣곤 해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댄다는 걸 그 사람들은 아는 거죠.
이건 어찌 보면 저에게 풀리지 않은 숙제에요. 공동체에서 만나게 되는 싫은 사람, 그 사람이 떠나면 또 찾아오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이에요.
제가 회복적 생활교육을 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말은 ‘직면’이에요.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고, 피해자도 자신의 피해가 온전히 회복되려면 어떤 필요가 채워져야 하는지 자신을 직면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좋은 말만 하고 갈등은 덮고 피하고 그런다고 평화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금은 시끄럽기도 하지만, 숨기지 않고 서로의 요구를 말할 수 있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꾸 문제제기하는 사람은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으로 생각하더라고요.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될 텐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냥 5분이면 하는데 그냥 해주면 될 텐데’ 저는 이런 말을 들으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요. 왜 이런 말에 분노하게 될까요? 그러고 보면, 저 또한 스트레스 관리가 생각만큼 잘 되고 있진 않은 것 같아요? 선생님이 보기에도 그렇죠?
30대에 학교장의 비리를 학운위에서 하나하나 지적하며 저지하다가, 학교장의 권한으로 사회과 티오감이 돼서 3년 만에 다른 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선배교사가 못 지켜줘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그만 나서라고 그러더군요. 그렇게 나서다가 결국 혼자 피해를 당하지 않았냐고 하면서요. 그때 제가 ‘30대라서 이러지 설마 40대에도 이러겠어요?’라고 말했는데, 40대에도 이러고 있네요. 40대엔 좀 누그러질 줄 알았는데‧‧‧‧‧‧
질문에 답하기가 애매하네요~ 제가 꿈꾸는 회복적 생활교육을 말씀드리면 되겠죠?
저는 학교에서 따뜻한 공동체를 경험하게 하고 싶어요. 또 학급에서 학급의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동체를 꾸리게 하고 싶어요. 잘못을 저지르면 잘못했으니까 ‘나가’하고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직면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해결책을 찾아보고, 그 해결책을 찾는데 공동체가 같이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해갔으면 좋겠어요. 그런 공동체를 경험해야 사회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지 않을까요?
회복적 생활교육에서 지향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 ‘관계’, ‘피해’, ‘책임’, ‘정의’입니다.
북미와 뉴질랜드 원주민들은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둘러 앉아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함께 의논했다고 해요. 문제를 일으킨 사람, 피해를 입은 사람, 마을의 원로들이 함께 모여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따위를 함께 이야기하는 방식인데, 이 방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원주민 사회의 전통적인 공동체 유지 방법이라 할 수 있어요. 이것이 ‘회복적 정의’의 뿌리라고 할 수 있죠.
아! 여기서 ‘회복적 정의’라는 개념이 등장했는데 ‘회복적 생활교육’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회복적 정의’는 생소한 분들도 계실 거예요. ‘회복적 정의’는 ‘회복적 생활교육’보다 상위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쉬울 텐데요‧‧‧‧‧‧
회복적 정의는 정의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이자 방식으로서 어떤 잘못(범죄)에 연관이 있는 가능한 모든 사람들이 잘못을 바로잡고 피해가 최대한 치유되도록 함께 피해와 필요를 확인하고 책임과 의무를 규명해가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회복적 정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워드 제어가 <회복적 정의란 무엇인가?> 책에서 한 말인데 ‘회복적 정의’를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현 시점에서 ‘회복적 정의’는 회복적 사법, 회복적 도시, 회복적 학교 등 여러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회복적 정의 실험은 1974년 캐나다 엘마이라에서 시작되었어요. 이후 1990년대부터 북미, 오세아니아, 유럽 몇 나라에서 청소년 범죄나 학교 폭력 같은 소년 사건을 다루는 영역에서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 회복적 정의가 들어온 것은 2000년대 회복적 사법 분야에서 시도되었지만 널리 퍼지지는 못했고, 2010년에 회복적 정의 운동이 교육 분야로 확대되면서 ‘회복적 생활교육’이라는 용어도 만들어졌어요. 우리나라에 회복적 생활교육이 퍼지는 속도는 회복적 정의의 아버지 하워드 제어가 볼 때에도 놀라울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사법에서보다 교육에서 더 빠른 속도로 퍼지는 것도 놀라운 현상이고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회복적 생활교육이 잘 맞았던 건 옛날 공동체의 전통이 살아있던 마을에서 우리들이 문제를 해결하던 방식이랑 비슷해서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옛날엔 동네에서 어떤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면 그 집에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그 아이가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거라고 서로의 사정을 잘 알았잖아요. 그래서 문제를 일으킨 아이를 나무라기도 하지만, 마을 어른들이 더 챙겨주기도 하고 그 집의 문제를 도와주려고 하기도 했고요. 그 전통이 회복적 정의에서 추구하는 바와 비슷한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교육에도 빠르게 전파된 게 아닐까요? 이런 자세한 이야기를 더 알고 싶으시면 따끈따끈한 신간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이재영)>를 보시면 ‘회복적 정의’에 대한 모든 것이 아주 쉽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제가 회복적 생활 교육이 전파되던 초창기에 배워서 그런가 봐요. 이게 뭔지 잘 모르는데 이것의 사용법과 사례를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래서 제가 여기저기 사용법과 사례를 이야기하러 다니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저는 2011년에 ‘회복적 정의’ 강의를 처음 들었어요. 시험 기간 전체 교직원 연수 시간에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이재영 원장이 와서 강의를 했어요. 저는 늘 그렇듯 서술형 채점을 하기 위해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채점을 열심히 하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이 단어가 제 귀에 딱 꽂히는 거에요.
“그래서 피해자의 피해는 좀 회복되었습니까?”
머리 한 대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제가 그 때 학년부장을 하면서 열심히 담배를 잡고 무단 지각, 결과를 잡고, 학폭 사건에는 엄벌을 줘서 학교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뛰어다니던 때였거든요. 그렇게 열심히 하고 다녔는데 ‘피해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예요. 허를 찔린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이거 뭐지?’ 하면서 찾아서 배우러 다녔어요.
처음에 회복적 생활교육 기본 워크숍을 참가했을 때는 ‘이상적인 소리 하고 앉았네. 학교 현장은 전쟁터인데 아주 꿈같은 소리만 하고 있구만. 어떻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나? 그렇게 좋게좋게 화해하면 학교의 정의는 누가 지켜?’ 이런 생각으로 자리를 지켰어요. 당연히 삐딱하게 앉아서 계속 이런 부정적 모습만 보이고 있으니, 강사는 ‘저 사람은 맘에 안 들면 안 오면 될 텐데 왜 계속 나와서 저렇게 듣고 있을까’라고 생각했더라고요. 나중에 들으니‧‧‧‧‧‧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하고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회복적 대화 모임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갈등이 풀리는 장면을 직접 보고 나니, 그 때부턴 회복적 정의의 맹신도가 되어 여기저기 전파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이것이 공교육을 살릴 희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네요.
너무 고마운 말씀이신데요?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걸까요?
저는 다행히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났어요. 물론 안 그랬던 학교도 있지만요. 실패해도 뭐라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할 수 있게 하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 모임 집행부할 때도 백옥진 회장님이 하고 싶은 것 다하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무모한 시도도 눈치 보지 않고 막 할 수 있었어요. 지금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혁신학교라서 절차와 결재가 까다롭지 않아서 눈치 보지 않고 아무 일이나 일을 벌일 수 있어요. 암튼 기분 좋은 말이네요~
세월호 참사 기억 수업 자료를 매년 만들었어요. 1주기 때부터 계속 만들다 보니 4월이 다가오면 어떤 주제로 수업을 만들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수업 자료를 만들어 전역모, 전교조 누리집에 올리는데 늦게 올리면, 수업 자료 언제 올라 오냐고 찾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런데 올해 7주기 기억 수업은 정말 만들기가 힘들었어요. 7주기가 되도록 된 것이 무엇인지, 왜 아직도 진실 규명조차 안 된 것인지 너무 답답했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무책임하고 무력한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영상 자료만 모아놓고 내내 못 만들고 있었어요. 그 고민을 그대로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한 선생님이 자신의 수업자료를 보내주셨어요. 2014년 열 살이었던 지금의 고1 학생들이 쓴 그 날의 기억을 모은 수업이었어요. 열 살이 기억하는 그 날의 모습을 보니 이 아이들도 그 날을 기억하는 구나. ‘그럼 거기에서 시작하면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세월호 참사를 뭐라고 규정지어서 설명할 수 없어서 난감했는데, 그냥 열 살이었던 아이들의 그 기억들에서 시작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수업 자료를 만들었어요. “안전한 나라를 만들려면?” 이라는 주제로
이런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피해자에게 어떤 지원이 있어야 하나요?
세월호 참사, 책임져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유는?
이 질문에 대해 구글 문서 하나에 각자의 생각을 쓰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수업으로 진행했어요. 8주기 기억수업 자료는 노란리본으로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서 진상규명도 되고 피해자의 문제도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이 외에 작년에 온라인 창체 공장을 만들어서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창체 자료를 만들었어요. 작년에 제가 학생부에 있어서 창체 자료를 만들어야 했거든요. 학교폭력예방교육, 사이버 폭력예방교육, 언어폭력예방교육, 디지털성범죄예방교육, 인권교육, 가정폭력예방교육, 생명존중교육, 슬기로운 인권생활 1편-코로나 시대 인권, 슬기로운 인권생활 2편-인종차별, 우리 반 존중의 약속 만들기, 기후행동 등의 자료를 만들었어요. 이 자료들은 우리 모임 샘들이 늘 하시던 대로 모두 모임 누리집에 올려두었고요.
네~ 2020년부터 개설해서 2년째 수업하고 있어요.
교양 과목이고, 교과서는 없습니다.
교과목 신설 승인 신청서를 2페이지로 작성하면 도교육청 승인 허가가 쉽게 나더라고요. 저희 학교는 덴마크 류슨스틴 고등학교와 국제교류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과목을 만들게 됐어요. 수업으로 만들어서 수업시간에 국제 교류를 진행하려고 만든 거죠.
2018년에 고3 학생들에게 사회과 연합으로 오연호 선생님의 책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를 가지고 독서 수업을 진행했어요. 그때 저자 오연호를 불러서 강연을 들었습니다. 샘 말씀이 고3 학생들이 너무 팔팔하데요. 다른 학교 고3들은 절인 배추처럼 늘어져 있는데 소금간 안 한 배추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덴마크와 교류할 학교를 찾고 있는데 할 거냐고 물어서 냉큼 한다고 했죠! 그 후 국제교류를 추진할 부서, 담당자를 정하는 데 여러 고충과 난관이 있었지만..... 암튼 3년째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제교류 담당자 협의회를 가보면 거의 다 영어, 제2외국어 교사더라고요. 역사교사이고 제가 영어를 못하는데도 덴마크와 교류하고 싶은 이유는 덴마크의 복지 시스템을 보고 우리도 저런 사회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예요. 그걸 가능한 세계가 있다는 걸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맞아요. 사회를 가르치는 게 재밌어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연관시켜 할 이야기가 많거든요. 그래서 통합사회를 재밌게 수업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제 정체성은 어쩔 수 없이 역사교사인가 봐요. 통합사회 OT영상, 한국사 OT영상 두 가지를 만들었는데 주변 샘들이 한국사 OT영상에 더 저의 진심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아니요. 한국사는 1개 반 3시간만 수업해요. 통합사회는 3개 반 12시간 수업. 그리고 덴마크 문화의 이해 2개 반 2시간 수업합니다. 역사교사이지만 3시간만 역사 수업을 하는 교사입니다. ㅋㅋㅋ.
성장을 돕는 조력자; 자기를 발견하게 하고, 성장할 수 있게 적절하게 코치해주고, 생각을 넓힐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는 사람? 이 정도 선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제가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데, 대학입시에서 형식적으로 치르던 면접고사에서 ‘앞으로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임용고사를 봐서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했더니 당황하던 교수님들의 얼굴이 지금도 떠오르는 군요. 교직과정이 설치되지 않은 국사학과였던 거죠.
제 꿈을 이룰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학력고사는 하나의 대학만 지원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 대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죠. 그렇게 대학에 입학해서는 학생회 활동하면서 지내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생각해보면 저는 ‘정의’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대학교 3학년 때 5‧18 진상규명을 외치며 거리에 있었던 생각이 나요. 선전물을 나눠주면 학생들에게 고생한다고 말해주던 시민들. 그 때 정말 열심히 했어요. 정의를 바로 잡기 위해서요. 그래서 지금도 5‧18 수업할 때 샘이 그 때 열심히 해서 전두환 노태우 구속시켰다고 이야기한답니다.
그러다가 4학년 졸업할 때 교육대학원을 가려고 하니 교직 학점 최소 4학점을 안 들어서 들어갈 수 있는 데가 별로 없더라고요. 아무 대책 없이 살아온 거죠. 그래도 운 좋게 6학기를 다니면 교원자격증을 주는 교육대학원이 있어서 그 교육대학원에 가서 자격증을 따서 무사히 교사가 될 수 있었어요.
지난 우리 모임 연수 때 “까마득한 선배교사”로 저를 표현하는 걸 들으며 저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자각했어요. 모임에서 늘 받아먹던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챙기고 주는 입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걸!
2003년 자주연수에 처음 참가해서 뻘줌해 하고 있을 때 말 걸어주던 선배 교사들처럼 모임에 발을 내딛는 후배 교사들에게 말 걸어 편하게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할까 합니다.
인터뷰어가 정말 질문을 잘 하십니다. 첫 질문은 가볍게 근황을 물어보면서 시작하고 그러면서 깊은 이야기까지 끌어내시고........‧ 장콩 샘은 서클을 진행하셔도 참 잘하실 것 같아요.
지금 누군가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면, 내일 아침 눈을 뜬 내게 버터 바른 영어회화 실력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덴마크 국제교류에서 자유자재로 구상하고 일을 벌이고 싶은데 영어가 장벽이 되어서요. 아니면 영화 ‘승리호’에 나오는 번역기를 구입하는 게 빠를까요? 이리저리 맘대로 튀는 정신없는 대화를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