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개개인이 가진
세계의 개별성을 들여다보는 시선

사는 이야기 > 「기억의 전쟁」 공동체 영화상영회 후기

>>원지혜(경기 송운중)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 시국 속에서 한국 근현대사 수업을 진행하며 그 어느 때보다 수업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좀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 교과서의 텍스트를 넘어 학생들의 삶과 연계되고,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수업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진심이 담긴 어떤 수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여전히 굳게 믿기 때문이다. 소위 ‘한국사’ 교과서 첫 세대인 나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한국 근현대사의 비중이 축소된 교과서로 역사를 배웠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한국 근현대사에 진심인 역사 선생님을 만났고, 덕분에 교과서 너머의 수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은 늘 나를 충격과 고민에 빠뜨렸고, 두근거리게 했다. 돌아보면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애정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끈 것이다. 이렇게 한국 근현대사에 진심이었던 내가 한국 근현대사로만 이루어진 중학교 3학년 역사를 전담으로 가르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잘하고 싶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주제 한 주제 넘어갈 때마다 아쉬움이 남아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일 년이었다.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물음과 수업의 여백을 메워나가기 위해 동료 역사 선생님들과의 대화가 절실했는데,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마련해주시는 다양한 연수에 한 번, 두 번 참여하는 것이 이러한 갈증을 해결해주곤 했다. 연수를 듣고 나면 참 좋았다. 시간이 나면 전국역사교사 모임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새로운 연수 공지가 뜨진 않았는지 첫 화면의 공지 창을 넘겨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영화 <기억의 전쟁> 공동체 상영 및 제작진과의 대화를 마련하였다는 소식이 떴다. 바로 그 전 주말에 영화 <기억의 전쟁>을 예매하려다가(종로 인디스페이스에서 오프라인 상영을 하고 있었다.) 그 주에 독서 모임이 있는 것을 알고 포기했었는데, 전역모에서 영화 상영회 및 제작진과의 대화를 마련한다니. 분명 혼자 영화를 보고 왔다면 집에서 GV 기사를 한참 찾아보며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이렇게 전역모 연수는 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신기했다. 별 고민 없이 바로 신청하기 버튼을 눌렀다.


  ZOOM 연수에 참여하기 전, 선행되어야 할 것은 영화 <기억의 전쟁>을 온라인으로 감상하는 것이었다. 3월 25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링크가 오픈되었고, 영화가 궁금했던 나는 첫날에 바로 링크에 접속하여 영화를 감상했다. 으레 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꼭 등장하는 ‘귀를 찢는’ 포탄 소리와 ‘선혈이 낭자한’ 장면은 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는 극적인 편집 효과나 자극적인 재연 대신,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학살이 자행된 퐁니·퐁넛 마을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아내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영화를 굳이 1부와 2부로 나눠보면 다음과 같다. 1부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에 대한 퐁니·퐁넛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듣는다. 2부에서는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Untold) 억겹의 시간을 넘어, 응우옌 티 탄 아주머니가 용기를 내 한국으로 와 시민 평화 법정에서 발언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응우옌 티 탄 아주머니와, 딘 껌 아저씨, 응우옌 럽 아저씨는 너무도 생생한 학살의 기억을 풀어놓는다. 증언의 참혹함에 비해 영화는 비교적 담담한 시선을 따라 전개되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절대 가벼이 여기거나 놓치지 않고 좀 더 많이, 좀 더 그 본의에 가깝게 전하려고 노력하는 제작자들의 마음이 영화 밖으로 고스란히 흘러나와 왜인지 더 슬프게 느껴졌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사건으로 인해 가족들을 모두 잃고, ‘내 삶은 가족들의 제사를 챙기기 위한 거였던 것 같아.’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던 응우옌 티 탄 아주머니는 한국으로 와 시민 평화 법정에 서서 증언을 한다. 그런 아주머니를 향해 참전 군인들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사실을 부인하고, 아주머니가 국가를 위해 한 몸을 바친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한다며 날 선 비난을 쏟는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이라는 사안을 두고 해소되지 않은 갈등, 즉 기억의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위와 같이 <기억의 전쟁>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기억과 증언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디에 가까운가? 솔직히 말하자면, 참담하게도 가해자의 그것도, 피해자의 그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정부 때 미국의 요청을 받아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파병을 했고, 이로 인해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그 결과 한국군 현대화가 이루어졌다.’라는 단편적 사실의 모음에 지나지 않는 ‘국가의 기억’ 만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우리나라 참전 군인이나 전쟁의 과정에서 고통을 겪은 베트남 주민들의 경험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사람이 부재한’ 역사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이들 각각의 기억은 어디쯤 속할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을 수업 현장으로 어떻게 가져올 수 있을지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줌 연수는 제작진의 대화, 이야기 패널 선생님들의 발표로 구성되었다. 먼저 이길보라 감독님, 조소나 PD님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영화를 제작한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다양한 지점들(전쟁의 참상, 개인의 고통, 책임과 연대)을 교육 현장으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고민과 생각들을 나누었다. 


  이길보라 감독님은 개개인이 가진 세계의 개별성을 이해하는 감각이 뛰어난 분이다. 감독님의 이름을 처음 만난 곳은 이슬아 작가의 SNS였다. 개인적으로 담백하면서도 재치가 넘치는 이슬아 작가의 글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와 같은 ‘어딘 글방’을 다닌 영화감독 겸 작가라면 분명 내가 좋아할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다음으로 이길보라 감독을 마주친 곳은 온라인 서점 북펀딩을 통해 구매한 ‘수화 배우는 만화’의 추천사에서였다. 이길보라 감독은 자신을 ‘코다(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자란 청인 자녀)’라고 소개했다. 부모님의 세계를 ‘조용하고도 직관적이며 생동감있고 생생하다’고 표현한 것이 인상 깊었다.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려 암 투병을 하면서도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로서의 자부심을 놓지 않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출발하여 여러 모순적 상황(시간이 지나며 참전 군인들이 자아 분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함)에 부딪히며 만들어진 영화 <기억의 전쟁> 역시 그가 지닌 ‘남다른 감각’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생각한다.


  제작진과의 대화 시간에는 감독님과 PD님이 영화를 만들게 된 배경과 영화를 만들면서 느낀 여러 고민의 지점들을 들을 수 있었다. 무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세대이신(^^) 감독님과 PD님이 역사 교사로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현장에서 다룰 때 겪을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한껏 공감해주셔서 무지 친밀감이 느껴졌다. 기억의 상대성 및 개별성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하신 관점들도 매우 흥미로웠다. 줌 연수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해지며 현장감이 대단했다. 


  선생님들이 남겨주시는 채팅 댓글이 너무 좋아서 카카오톡-나에게 보내기로 옮겨두기도 했는데, 이 자리를 통해 선생님들의 댓글을 몇 개 소개하고 싶다. ‘(참전 군인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경험을 이야기할 언어가 없었다는 조소나 PD님의 말에 대해)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는 사람들은 그 감정을 처리해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기억이 난다.’, ‘기억의 전쟁이지만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네요.’, ‘충격과 혼란에 처하게 하는 것, 질문하고 이야기하게 하는 것, 역사 안에 있던 한 개인 한 개인의 존엄을 따라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등 연수에 참여한 선생님들끼리 보기에는 참 아쉬운 명대사가 연수 내내 우수수 쏟아져 정신 못 차리게 했다(!) 


  다음으로 이야기 패널이신 김민정 선생님, 박중현 선생님, 김선옥 선생님의 발표가 이어졌다. 금호고 김민정 선생님께서는 영화 연계 활동지와 수업에서 고민되는 지점들에 대해 나누셨다. 활동지의 발문과 발표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쳐 수업을 설계하셨는지가 물씬 느껴졌다. 활동지에는 ‘전쟁과 학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등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질을 꿰뚫는 발문들이 가득했다. ‘평화란 일상을 유지하는 힘’, ‘역사 교사로서 많은 죽음을 역사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데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아는 것부터 연대의 시작’과 같은 명언을 남기신(!!) 김민정 선생님의 발표는 현대사의 미해결 과제를 다루는 수업에서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있었던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박중현 선생님께서는 한일교류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에 대한 고민을 나누셨다. 선생님께서는 ‘베트남 전쟁의 기억’이 이제껏 어떻게 규정되어왔는지, 그 안에서 잊힌 기억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역사 교사로서 하나의 사건 속 다양한 주체들의 경험이 지워진 채 역사가 단순히 ‘집단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을 부단히 경계해야 함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 흔히 동일선상에 놓고 언급되곤 하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는 정부 차원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이 부재하였으며, 가해 주체가 사실에 대해 외면하는 등 다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짚어주셨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일본에게 사과받기 위해 베트남에게 먼저 사과해야 한다.’라는 식의 논리를 들이대기도 한다. (김민정 선생님의 활동지 자료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해-피해’의 단순 논리를 넘어 두 사건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의 삶에 두 사안 모두가 각자 고유한 의미를 가지며 존재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 미래 세대인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문제 해결을 위한 물꼬를 꾸준히 터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등 아직 갈 길이 멀고, 역사 교사들이 마중물 역할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했다. 


  베트남 호치민시 한국국제학교에 교감 선생님으로 계시는 김선옥 선생님이 마지막 발표를 진행해주셨다. 김선옥 선생님의 발표에서는 내가 정말 잘 모르고 있었던 부분들, 예를 들어 베트남에서 베트남 전쟁이 갖는 의미, 베트남전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생각, 베트남에 직접 거주하시면서 새롭게 알게 된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특성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베트남 역시 가깝고도 먼 나라인 듯하다. 여태까지 내가 알고 있던 범위를 넘어 새로운 베트남을 보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베트남전이 갖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거대하다. 학살의 고통 또한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나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사과 이후에는?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할까? 김선옥 선생님께서 는 단호한 목소리로 ‘학살과 사과는 수업의 시작점도 종착점도 아니다.’라고 이야기하셨다. 학생들과 어떤 감정들을 어디까지 공유할 것이며, 무엇이 교육적 구성인지 등 여전히 고려하고 고민할 지점들이 가득했다. 연수를 들으며 조금은 윤곽이 그려졌던 것들이 다시금 흔들렸다. 역시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들에게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인가? 김선옥 선생님은 이에 대해 ‘개인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국가 말고 사람을 중심으로 한 텍스트 보기’라는 명쾌한 답을 주셨다. 선생님의 발표를 들으면서 역사를 현실로 확장해서 실천으로 연결해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결국 역사 교사의 소명임을 느꼈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의 연수에 참여하는 시간은 늘 나에게 강한 자극이 된다. 연수가 끝나면 더 깊이 알게 되는 만큼 고민의 정도 또한 더해지지만, 종국에는 한 뼘 더 성장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전역모의 최전선에서 엄청난 추진력과 섭외력을 바탕으로 항상 좋은 연수를 기획해주시는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글을 마친다.

이전 03화 아띤타빠 미얀마! (힘내라 미얀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