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하는 날

by 두버지

1.

내가 굉장히 수동적이게 되는 영역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발이다.


2.

어렸을 때부터 두발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적당한 때가 되면 이발소나 미용실을 가서 이발을 했고,

그 적당한 때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지정해 주었다.

어린 시절엔 어머니, 현재는 여자 친구다.


3.

어렸을 땐,

귓가에 울리는 이발기의 굉음이 싫었고,

사각사각 날카로운 가윗날의 소리도 싫었다.

무섭기도 했다.


4.

나이가 들어서는,

잘 모르는 이발사/미용사의 스몰 토크를 받는 것이 부담스럽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별로 신경 쓰지 않다 보니,

굳이 이발을 해야 하나,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하며 넘겼다.

(참고로 나는 패션과 헤어스타일이 정말 꽝이다.)


5.

머리가 단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흉을 본다고 한다.

그런 흉을 직접 들은 적은 없었는데,

미연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방지해 줬기 때문이다.


6.

여자친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편이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고, 그 기준을 잘 세운다.


내가 도전에 실패하고, 이룬 것이 별로 없고,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할 때도

여자친구는 결과만 보고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7.

하지만 여자친구도 겉만 보고 판단할 때가 있고,

그건 내 머리와 옷이다.

"오빠가 그러고 다니면 내가 욕을 먹는다."


8.

여자친구를 만난 뒤부터는

내 기준보다 훨씬 더 짧은 3-4주 간격으로 이발을 하게 됐다.

4년째 실랑이를 벌인다.

"아직 괜찮은 거 같으니 다음에 자를게."

"오빠가 그러고 다니면 내가 욕을 먹는다."


9.

내가 생각하기엔 아무도 욕하지 않을 거 같다.

그래도 나는 여자친구의 말에 반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왜 남의 시선을 의식하냐는 말도 하지 않는다.

(이건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10.

여자친구는 유체역학만큼이나 복잡하고 알 수 없어서 재미있다.

어떨 때는 남의 시선을 의식 안 하다가, 어떨 땐 의식을 한다.

옳은 일(쓴소리)을 중요시하다가도, 측은지심을 더 생각할 때도 있다.


11.

여자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가 지저분할 때,

누군가가 '두버지 머리 좀 지저분한데?'

하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상하나 보다.


12.

4년째,

여자친구가 이발하고 오라고 하기 전까지,

내가 먼저 이발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만약 내가 머리를 신경 쓰고, 먼저 이발을 하러 간다면

여자친구도 잔소리를 안 해서 좋겠지만,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다.





-끝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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