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계약서에 서명하다

29회 관계를 문서로 정리하다

by 베풂과 행복

29일 차. 고문 계약서에 서명하다


고문 위촉 계약서를 받았습니다. 흰 봉투를 받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잠시 그대로 두었습니다.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이 문서가 어떤 의미인지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회사와 저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는 문서라는 것 말입니다. 기분은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첫 장을 넘기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구는 ‘비상근 고문 위촉’이었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또렷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임원이 아니라는 사실, 회사의 일상에 포함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정확히 실감했습니다.


문서의 문장들은 일반적인 계약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문의 역할과 기간, 직위와 처우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회사와 저의 관계가 이제는 이런 문장들로 정의된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막연하게 느껴지던 ‘거리감’이 문서의 형태를 갖춘 순간이었습니다.


계약서를 읽는 동안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습니다. 서명란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바로 서명했습니다. 결정을 미루고 싶지 않았고, 이미 끝난 관계를 다시 붙잡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 문서는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기보다는, 남아 있던 연결을 정리하는 역할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서명을 마치고 문서를 다시 봉투에 넣으면서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지만, 예전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저를 정리했고, 저 역시 그 정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날 저녁, 계약서에 적힌 문장들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비상근이라는 말, 고문이라는 역할, 그리고 그 앞에 붙은 위촉이라는 표현까지. 그 단어들은 모두 제가 더 이상 회사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조용히 확인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회사와의 관계는 감정이 아니라 문서로 정리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미련이 아니라 정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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