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인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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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경기도 연천인지 포천인지 아무튼 ~천으로 끝나는 시골로 실습을 가게 되었다.
수의학과에서 그래도 예쁜 편에 속하는 여자 동기와 짝이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에서 대동물 병원을 운영하는 선배를 찾아갔다.
둥글둥글하고 아담하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푸근한 인상의 선배는 싱글벙글하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작은 구멍가게 같은 동물병원은 가축약품이라는 큰 글씨가 병원 전면창에 쓰여 있었다.
병원 사무장을 맡아보는 사모님과도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쌍용 코란도 지프의 뒷 좌석에 올라탔다.
아니 생각해 보니 뒷 좌석에는 나만 탔다
여학생은 조수석에 타서 선배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담소를 나누고 있다.
뒷좌석은 그냥 옆으로 된 벤치였고 나는 각종 기자재와 함께 짐처럼 걸터 앉아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잡고 몸을 지지하고 있어야 했다.
처음 도착한 농장에는 설사를 하는 황소가 있었다.
선배가 황소를 살피는데 정말 집채만 한 황소였다.
그냥 시골에서 보는 흔한 소가 아니라 정말 집채만 한, 웬만한 주택의 대문보다 키가 큰,
그래서 위로 올려다봐야 하는 소였다.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들소 같았다.
선배는 씩씩거리는 소를 다독거리며 밧줄로 소의 앞다리를 걸고 그 줄을 다시 소의 뿔에 건 다음 울타리에 동여 맺다.
그런 다음 수액을 준비하여 소의 경정맥에 사정없이 바늘을 후려치듯이 꽂아 버렸다.
그리고 수액병을 나에게 들고 있으라고 시켰다.
수액이 콸콸콸 잘 들어간다.
소가 씩씩거리며 분에 못 이겨 힘을 쓰는데 울타리 전체가 들썩거린다.
행여 소를 자극할까 봐 소의 큰 눈망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고 다소곳이 서있었다.
수액을 다 맞추고 현장을 정리한 후, 차에 다시 올라탔다.
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선배가 그렇게 소를 무서워해서 대동물 수의사를 할 수 있겠냐고 한마디 했다.
나는 '그런 것이 아니오라, 소의 감정까지도 세심하게 살피는 친환경 동물복지 수의학도'임을 강조하면서 소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고 항변을 했다.
사실 엄청 무서웠다.
그 몸집과 힘에 압도되어 두고두고 그런 소를 처음 봤노라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다.
그렇게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며 다음 농장으로 향했다.
비교적 확 트인 농장이었고 넓은 우리에 소들이 방목되어 있었다.
사실은 질퍽질퍽한 똥밭이었다.
이번에는 소의 직장 검사(Bovine Rectal Palpation)를 하려고 한다.
이번에는 선배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나에게 선뜻 직장 검사를 해보라고 시켰다.
소주인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소를 붙들고 있다.
선배는 소가 아플 수 있으니 똥을 좀 바르라고 알려줬다.
나는 앞서 있었던 소심함을 만회해 보려고 겉옷을 벗고 팔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오른손과 맨 팔에 땅에 있는 소똥을 치덕치덕 발랐다.
소의 항문에 손이 들어간다.
팔이 반 정도 들어갔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나에게 난소가 허락될 리 없었다.
선배는 어떤 상태냐고 물었고 나는 우물쭈물 그렇지만 왠지 알듯 모를 듯 대답을 회피했다.
선배는 자기가 시범을 보이겠노라고 하면서 주머니에서 기다란 비닐장갑을 꺼내
장갑을 끼고 직장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우 씨~"
진작 나에게도 비닐장갑을 줄 것이지...
나는 수돗가에서 손과 팔을 씻었다.
사실 똥은 더럽지 않았다.
나는 수의사가 될 사람이 아닌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똥과 함께 살아왔다.
우리는 그날의 진료를 일찍 마치고 예약해 놓은 매운탕 집으로 향했다.
우리를 위해 선배가 미리 예약해 놓으셨다.
감동이 밀려온다.
선배와 함께 하는 식사와 기울이는 소주잔에 선후배 사이의 정이 묻어난다.
그렇게 그날의 실습을 마치고 고단한 몸과 알싸하게 취기가 오른 채로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실습 리포트를 쓰는데 소의 난산에 관한 리포트를 썼다.
나는 산과학 책을 모두 읽고 요약해서 직접 리포트를 썼다.
그런데 다음 날 예쁘장한 그 여자 동기가 나에게 리포트를 보여 달라고 한다.
나는 내가 힘들게 쓴 리포트라서 거절하고도 싶었지만 대범해 보이고 싶어서 왠지 쪼잔하다는 비난이 두려워서 쿨함을 유지하고 싶어서 선뜻 리포트를 건네준다.
남학생이 형식도 없이 소탈하게 쓴 그 리포트를 여학생은 베껴 쓰면서 갖은 애교와 이쁨과 깔끔을 리포트에 추가하고 결국 두 개의 리포트를 받아 본 교수님은 대번에 누가 그 리포트를 베껴 썼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편하게 실습하고 조수석까지 차지했던 그 여학우…
리포트까지 가져가셨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립고 즐거웠던 그 시절의 실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는 끝까지 나의 '쿨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돌이켜 보면 어쩐지 허당이었다는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수의사 후배들을 응원합니다.
모두가 잘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