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셔의 판화 앞에서 아이들이 알려준 ‘연결’의 방식
에셔의 판화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두 가지 감정이 함께 떠오른다.
마우리츠 코르넬리우스 에셔(M.C. Escher).
그의 작품에는 질서와 혼돈, 대립과 조화처럼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한 화면 안에 함께 놓여 있다.
서로 반대처럼 보이는데도
그 안에서 균형이 잡혀 있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들과 함께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그냥 그림을 보는 시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작품 속에서는
서로 전혀 닮지 않은 존재들이
한 화면 안에서 맞물려 있었다.
특히 반대되는 이미지들이 이어져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장면 앞에서
아이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이 먼저 발견한 건
‘대립’이 아니라 ‘연결’이었다.
아이들은 곧 일상 속 예로 생각을 넓혀갔다.
시작과 끝.
해와 달.
행복과 슬픔.
하늘과 바다.
여자와 남자.
엄마와 아빠.
빛과 어둠.
오른손과 왼손.
서로 닮지 않았기에 한 쌍이 되고,
그래서 균형이 된다.
아이들의 말은 단순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세상이 유지되는 방식 같은 것을 보게 됐다.
조화는 ‘같음’이 아니라
‘다름’ 위에서 만들어지는 걸지도 모른다고.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럼 모두 같은 사람끼리만 살면
더 편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작게 말했다.
“그럼 엄마랑 아빠가 못 만났잖아.”
“그럼 우리도 못 태어났을 거고…”
그 말에 나는 잠깐 멈췄다.
다름은 불편한 게 아니라
서로를 만나게 하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고.
같지 않아서 만날 수 있었고,
반대여서 서로를 채울 수 있었다는 걸
아이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그림을 다시 바라보니
장면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분리된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어느 순간 맞물려 이어지고,
그 흐름 속에서
서로의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그걸 느끼는 눈빛이었다.
그날 작품 앞에서 나눈 대화는
예술을 넘어 삶으로 이어졌다.
서로 다르기에 균형을 이루고,
대립하는 듯 보여도 결국 연결되어 있는 세계.
그리고 함께 살아간다는 건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이라는 것.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서로 다른 두 아이를 바라보다 보면서,
‘다름’이 얼마나 다정한 균형이 될 수 있는지
아이들 덕분에 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