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완전히 알 수는 없어도 알아가는 과정은 가능하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다소 불편한 심경일 것이다. 이 글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내가 나를 설명하는 이유는 사후에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나는 나를 실제보다 더 좋게 본다. 상황에 따라 나는 달라지고, 내가 되고 싶은 나와 되어야 하는 나 사이에서 어떤 격차를 느낀다. 타인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나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며, 뇌는 불편한 진실을 나에게 유리하게 바꿔버린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게 애초에 가능한 건가? 내가 나를 모르면 어쩌라고?"
냉정하게 말하면, 완전한 자기이해는 아마 불가능하다. 심리학이 수십 년에 걸쳐 보여준 것은 우리가 얼마나 깊이 나 자신을 모를 수 있는가이지, 어떻게 하면 완전히 알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이 시리즈 내내 가져갈 전제이기도 하다. 한계를 안다는 것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그런데 서점에 가면 자기이해를 보장한다고 주장하는 책들이 넘쳐난다. 이걸 알면 너에 대해 잘 알거야. 네 행동을 잘 설명해줄 거야. MBTI, 에니어그램, 강점 진단, 내면아이 탐색 등등..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설명해주겠다고 한다. 진짜 그럴까?
그 도구들이 전혀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을 탐색하는 출발점으로는 충분히 유용하다. 다만 문제는 그 이후다.
개인적인 경험인데, 필자는 Big 5 성격검사에서 신경성(neuroticism) 점수가 높게 나온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스스로를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런데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어느 순간 정서적 각성이 줄었고, 화를 덜 내게 됐고, 감정의 진폭이 줄었다. 몸이 바뀌면서 마음도 바뀐 것이다. 그런데도 한동안 "나는 신경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검사 결과가 현실을 따라오지 못한 게 아니라, 내가 현실 대신 검사 결과를 계속 믿고 있었던 것이다.
성격 검사 결과는 순간을 포착하는 스냅샷이다. 특정 시점에, 특정 상태에서 찍힌 한 장의 사진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초상화처럼 벽에 걸어두고 "이게 나야"라고 선언하는 경향이 있다. 스냅샷은 나를 이해하는 데 참고 정도 할 수는 있지만, 온전한 나를 규정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장 흔히 하는 것이 내성(introspection)이라는 것이다. 조금 낯선 단어이긴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일기를 쓰거나, 왜 그랬는지 오래 생각하거나, 나를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조직심리학자 타샤 유리크(Tasha Eurich)의 연구는 여기에 반전이 있다고 한다. 내성이 많을수록 자기 이해가 높아지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연구팀이 수백 개의 연구를 검토한 결과, 오히려 과도한 내성은 자기이해를 낮추거나, 오히려 불안과 우울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내성을 할 때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형태 때문이다. 대부분의 자기성찰은 "왜(why)"로 시작한다. "나는 왜 이렇게 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느낄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그런데 우리의 뇌는 "왜"라는 질문에 답할 능력이 생각보다 훨씬 부족하다. 그래서 정직한 답 대신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낸다. 더 많이 파고들수록,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더 많이 만든다.
유리크는 대신 "무엇(what)"으로 질문하라고 제안한다. "나는 왜 화가 났을까"가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나는 왜 이 일을 피하는 걸까"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왜"는 이유를 찾게 만들고, "무엇"은 상태를 관찰하게 만든다. 대체로 관찰이 해석보다 더 정확하다.
내면을 파고드는 것 외에 나를 알아가는 또 다른 경로가 있다. 외부에서 오는 정보들이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 전부를 볼 수 없다. 등 뒤가 보이지 않듯,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내가 모르는 나의 패턴이 무엇인지는 나 혼자서는 접근하기 어렵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조하리 창(Johari Window)의 세 번째 영역이 바로 이것이다. 타인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나의 영역 말이다. 이 영역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내면을 들여다봐도 줄어들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만 가까워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을 볼 때 상황보다 성격을 먼저 본다. 동시에 타인도 나를 그렇게 본다. 내가 그날따라 말수가 적었던 건 피곤해서였지만, 상대는 내 성격이 그렇다고 기억한다. 따라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나의 이미지가 타인에게 쌓여간다. 그 이미지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강력한 정보를 담고 있을 수 있다.
타인의 피드백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나를 보여주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불편함은 오히려 자기 이해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단서다. 방어기제가 가장 열심히 작동하는 지점에 대개 내가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나에 대한 무언가가 있다.
물론 모든 피드백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타인도 자신의 편향을 갖고 나를 본다. 그러나 여러 사람에게서, 다른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내가 강하게 부정하고 싶을수록 그렇다.
자기이해를 어떤 목적지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충분히 많이 들여다보면, 어느 날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완전히 이해되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심리학이 말하는 것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고, 지금의 나와 10년 후의 나도 다를 것이다. 완성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점의 나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반복되는 것이 자기를 점점 더 이해하게 하는 정석적인 방법에 더 가깝다.
미리 말하지만 이 시리즈는 나를 완전히 아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사회 심리학자의 시선에서 그런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나를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 그리고 그 가능성이 어떤 형태로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를 보는 눈은 달라진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오래된 가르침처럼 나를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부터가 중요하다.
Eurich, T. (2018). What self-awareness really is (and how to cultivate it). Harvard Business Review. https://hbr.org/2018/01/what-self-awareness-really-is-and-how-to-cultivate-it
Eurich, T. (2017). Insight: Why we're not as self-aware as we think, and how seeing ourselves clearly helps us succeed at work and in life. Crown Busin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