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누르면 어디로 가는가?
어릴 때부터 우리는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컸다. 화가 나면 참고, 슬퍼도 티 내지 말아야 한다. 불안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고.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잘 조절하는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면, 그 감정을 느끼지 않는 걸까? 그냥 사라지는 걸까?
이별 후 상대를 잊으려고 할 때, 이상하게도 그가 더 자주 떠오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다이어트 중에 에그타르트를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에그타르트가 더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도 같은 구조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억압의 역설(ironic rebound effect)이라고 부른다.
하버드 대학교의 대니얼 웨그너(Daniel Wegner)는 이 현상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참가자들에게 5분 동안 흰 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더니, 그들은 평균 1분에 한 번 이상 흰 곰을 떠올렸다. 반면 그들은 억압 기간이 끝난 후 오히려 흰 곰을 더 강하게, 더 자주 떠올렸다. 즉 억누른 만큼 반동이 온 것이다.
생각을 밀어낼수록 그 생각은 수면 아래에서 더 단단해진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억압은 감정을 없애지 않는다. 잠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감정은 언제라도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감정을 자주 억압하는 사람들은 어떤 비용을 치르게 될까?
스탠퍼드 대학교의 제임스 그로스(James Gross)와 올리버 존(Oliver John)은 감정 표현을 억압하는 경향이 높은 사람들을 추적했다. 결과는 일관됐다. 억압하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감정을 덜 경험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더 많이 경험했다. 삶의 만족도가 낮았고, 우울과 불안 수준이 높았으며, 대인 관계의 질도 떨어졌다.
억압은 부정적 감정을 줄이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은 줄어들지만, 내면에서 느끼는 감정의 강도는 그대로다. 즉 억압은 감정을 조절하는 게 아니라 감정 위에 덮개를 씌우는 것에 가깝다. 덮개 아래의 것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단순히 성숙한 모습으로 보이는가?
감정을 억압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든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감정적으로 자극적인 영상을 보면서 반응을 억압하도록 지시받은 참가자들은 그렇지 않은 참가자들에 비해 영상 내용을 훨씬 적게 기억했다. 감정을 누르는 데 인지 자원을 써버리니, 정작 정보를 처리하는 데 쓸 자원이 부족해진 것이다.
코칭 현장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자주 만난다. 회의 중에 불편한 감정을 꾹 눌렀다는 분들이 "그 회의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티 나지 않게 우리의 일상을 갉아먹고 있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로스 연구팀은 같은 해 또 다른 실험을 했다. 서로 모르는 두 여성이 불편한 주제로 대화하게 했다. 한 명은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다른 한 명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감정을 억압한 당사자만 힘든 게 아니었다. 억압하는 사람과 대화한 상대방의 혈압도 유의미하게 올라갔다.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대화할 때 상대의 표정, 목소리 톤, 몸짓을 끊임없이 읽는다. 상대가 감정을 억압하면 이 신호들이 어긋난다. 말하는 내용과 비언어적 신호가 맞지 않는 것이다. 무언가 어색하고 불편한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태. 이 미묘한 불일치가 상대방에게 생리적 긴장을 만든다.
나는 티를 안 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이미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감지되지 않은 긴장이 관계 사이에 조금씩 쌓인다. 심지어는 서로를 모르는 사람끼리도 그 미묘함을 눈치채는데, 가까운 사이는 어떻겠는가? 서로를 잘 알면 상대가 부정 감정을 억압하고 있음을 더 잘 캐치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감정을 즉각 표현하는 것이 정답인가?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감정을 무분별하게 쏟아내는 것도 또 다른 문제를 만든다. 심리학이 말하는 것은 표현이냐 억압이냐의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다.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다른 이야기다.
핵심은 감정을 없는 것처럼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느껴지는 것을 느껴지는 것으로 먼저 인정하는 것. 억압과 표현 사이 어딘가에, 감정을 알아차리고 다룰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 쉼터를 찾는 것이 다음 화들에서 이어갈 이야기다.
Butler, E. A., Egloff, B., Wilhelm, F. H., Smith, N. C., Erickson, E. A., & Gross, J. J. (2003). The social consequences of expressive suppression. Emotion, 3(1), 48–67.
Gross, J. J., & John, O. P. (2003). Individual differences in two emotion regulation processes: Implications for affect, relationships, and well-being.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85(2), 348–362.
Richards, J. M., & Gross, J. J. (2000). Emotion regulation and memory: The cognitive costs of keeping one's cool.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9(3), 410–424.
Wegner, D. M., Schneider, D. J., Carter, S. R., & White, T. L. (1987). Paradoxical effects of thought suppress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53(1), 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