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시작된다

몸의 신호를 무시하면 생기는 일

by 사심가득

몸이 먼저 반응한다

19세기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꽤 도발적인 주장을 했다. 우리는 슬프기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울기 때문에 슬프다고. 감정이 신체 반응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신체 반응을 뇌가 해석하면서 감정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지금은 James-Lange 이론으로 불리는 이 관점에 따르면, 몸은 감정의 원인이지 결과가 아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 아이디어가 심리학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은 아니나 여전히 그의 관점을 채택하는 후대 심리학자들도 많다. 그의 가설을 현대 신경과학으로 정교하게 발전시킨 사람이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Antonio Damasio)다. 그는 소마틱 마커 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을 주장했다. 몸의 신호가 우리의 판단과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다.


다마시오 연구팀은 뇌의 복내측 전전두피질(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 vmPFC)이 손상된 환자들을 연구했다. 이 환자들은 지능, 언어, 논리 능력이 모두 정상이었다. 그런데 일상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도, 다음 주 약속 날짜를 잡는 것도 끝없이 고민하다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환자들에게는 신체 신호를 감정 정보로 변환하는 메커니즘이 손상되어 있었다. 건강한 사람들은 어떤 선택지를 떠올릴 때, 미묘한 신체 반응이 선행된다. 이 선택지는 왠지 긴장되고, 저 선택지는 왠지 편안하다는 식의 신호이다. 다마시오는 이것을 '소마틱 마커(somatic marker)', 즉 몸에 새겨진 표시라고 불렀다. 이 표시들이 의식적인 추론 이전에 이미 방향을 제시한다. 그 신호가 없으면, 우리는 모든 선택지를 동등하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일어나는 그 많은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진다.


직감은 근거 없는 감이 아니다. 몸이 먼저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목소리를 얼마나 잘 듣고 있는가

몸이 감정 정보를 먼저 처리한다면, 그 신호를 얼마나 잘 감지하느냐도 중요해진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내수용 감각(interoception), 즉 몸 안에서 오는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이라고 부른다.


흥미롭게도 이 능력은 사람마다 상당히 다르다.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아무런 도구 없이 자신의 심박수를 세는 과제를 사용한다. 수기로 센 심박수와 실제 심박수가 얼마나 정확하게 일치하는지를 측정하는 것이다. 이 과제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사람들은, 즉 자기 몸의 신호를 잘 감지하는 사람들은 감정 경험의 강도가 더 높고, 감정을 더 세밀하게 인식하며, 감정 조절 능력도 더 높은 경향을 보인다.


반면 이 능력이 낮은 경우, 몸에서 오는 신호를 잘 감지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긴장하고 있는지, 불안한지, 흥분하고 있는지를 몸을 통해 읽어내는 것이 어렵다. 머리로는 "별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이미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을 수 있다.




몸의 신호를 무시하면 생기는 일

우리는 종종 이 신체 신호를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바쁠 때, 집중해야 할 때, 감정을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 지난 글에서 살펴본 감정 억압도 결국 몸의 신호를 차단하는 것이다.


몸의 신호를 오래 무시하다 보면, 그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 자체가 둔해질 수 있다. 만성적으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나는 스트레스를 별로 못 느낀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스트레스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읽는 통로가 막혀버린 것일 수 있다.


코칭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패턴이기도 하다. "딱히 힘든 건 없는데 요즘 너무 무기력하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몸 어딘가에서는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오랫동안 무시해온 탓에 그 신호가 의식까지 올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 본인의 경험이기도 하다. 석사 과정 중 갑자기 심장이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수업 때 심장이 조이는 느낌과 함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아 응급실을 찾았다. 비싼 검사를 받았지만 신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아 얼마 후 교내 보건소 가정의학과를 다시 찾았다. 증상을 설명했더니 의사가 조용히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PHQ-9 (Patient Health Questionnaire-9) 검사지였다. 자가 보고를 해보니 경미한(mild) 우울증 수준이 나왔다.


당시엔 솔직히 의아했다. 나는 원래 밝은 사람인데? 내가 우울하다는 생각은 정말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석사 생활의 스트레스가 이미 몸에 쌓여 있었고, 몸은 그것을 심장 통증이라는 형태로 먼저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는 몰랐지만, 몸은 알고 있던 것이다.




몸에 귀 기울이기

몸의 신호를 더 잘 들어야 한다.


이것이 명상이나 요가를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더 일상적인 방법들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 갑자기 어깨가 올라가거나, 호흡이 얕아지거나, 위장이 조여드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신호가 "지금 나에게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몸의 언어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감정을 안다는 것은 머리로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그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등을 분석하는 것만이 아니다.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나를 이해하는 여정의 절반은 이미 몸 안에 있다.




부록: 우울증 자가진단 (PHQ-9)

직접 해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PHQ-9이 저작권이 없는 오픈 검사라서 공유해도 되는데, 혹시 문제가 된다면 댓글 남겨주세요.)


지난 2주 동안 아래 문제들로 얼마나 자주 불편함을 느꼈나요?

각 문항에 0~3점으로 답하세요.

0 = 전혀 없음 / 1 = 며칠 동안 / 2 = 7일 이상 / 3 = 거의 매일


일 또는 여가 활동에서 흥미나 즐거움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기분이 가라앉거나, 우울하거나, 희망이 없다

잠들기 어렵거나 자꾸 깨어난다, 또는 너무 많이 잔다

피곤함을 느끼거나 기운이 거의 없다

식욕이 없거나 과식한다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 또는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거나 주변을 실망시켰다는 느낌이 든다

신문을 읽거나 TV를 볼 때 집중하기 어렵다

다른 사람이 알아챌 정도로 너무 느리게 움직이거나 말한다, 또는 반대로 너무 안절부절하거나 들떠 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 또는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를 해치려는 생각이 든다


점수 합산 후 해석

0–4점: 우울 증상 없음

5–9점: 경미한 우울

10–14점: 중간 정도 우울

15점 이상: 전문가 상담 권장

이 검사는 선별 도구이며 진단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10점 이상이거나 마지막 문항에 체크했다면 가까운 병원이나 상담소를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참고문헌

Damasio, A. R. (1994). Descartes' error: Emotion, reason, and the human brain. Putnam.

Damasio, A. R. (1996). The somatic marker hypothesis and the possible functions of the prefrontal cortex.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B, 351(1346), 1413–1420.

James, W. (1884). What is an emotion? Mind, 9(34), 188–205.

박승진 외 (2010), 한글판 PHQ-9 신뢰도와 타당도 연구, 대한불안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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