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사건이 아니라 해석에서 온다

같은 감정을 다르게 소화해내는 법

by 사심가득

준비한 논문 발표를 앞두고 누구는 잔뜩 긴장된다고 하고, 누구는 묘하게 설렌다고 한다. 상사에게 기획안에 대한 냉철한 피드백을 받고 누구는 의기소침해지고, 누구는 오히려 동기가 높아진다. 같은 이별을 해도 어떤 사람은 몇 년을 헤매고, 어떤 사람은 의외로 빨리 털고 일어난다.


같은 상황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심리학의 대답은 단순하다. 감정은 사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오기 때문이다.




심장이 뛰어서 두렵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제임스-랑게 이론에서 감정과 생리적 반응에 대한 통찰을 남겼다. 인간은 슬프기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울기 때문에 슬프다. 몸의 반응이 먼저고, 감정은 그것을 뇌가 해석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는 같은 신체 반응이 다른 감정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컨대, 발표 전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것을 혹자는 "두렵다"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설렌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 두 감정의 생리적 반응은 사실 거의 같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몸이 아니라, 그 신체 신호에 붙이는 의미다.


이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버클리 대학교의 심리학자 리처드 라자루스(Richard Lazarus)다. 그의 평가 이론(appraisal theory)에 따르면, 어떤 상황이 감정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감정을 만든다.


라자루스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사건을 마주할 때 거의 즉각적으로 두 가지를 평가한다.


첫 번째는 1차 평가다. 이것이 나에게 중요한가? 위협인가, 도전인가, 아니면 나와는 무관한가? 같은 발표를 앞두고 "이거 망하면 끝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한 번 해보는 경험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1차 평가에서 갈린다.


두 번째는 2차 평가다. 나는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내 자원과 능력이 충분한가? 같은 상황을 "도전"으로 본 사람도 "나는 못 할 것 같다"고 느끼면 불안이 찾아온다. 반면 "위협"으로 봤더라도 "나는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넘겨왔다"는 기억이 있으면 감정은 달라진다.


감정은 상황의 산물이 아니라 해석의 산물이다.




해석을 바꾸면 감정이 바뀐다

이 원리를 실천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인지 재평가(cognitive reappraisal)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제임스 그로스(James Gross)는 수십 년에 걸친 연구에서 인지 재평가가 감정을 억압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줬다. 억압은 감정이 이미 올라온 뒤 표현을 막는 방식이다. 재평가는 감정이 완전히 올라오기 전, 상황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이다. 감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더 일찍 개입한다는 뜻이다.


재평가를 많이 쓰는 사람들은 긍정적 감정을 더 많이 경험하고, 부정적 감정은 덜 경험한다. 우울과 불안 수준이 낮고, 삶의 만족도가 높으며, 대인 관계도 더 좋다. 억압과 달리 기억을 방해하지도 않고 인지 자원도 크게 소모하지 않는다.


2024년 Nature Neuroscience에 발표된 연구(Bo et al., 2024)는 fMRI를 통해 인지 재평가가 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더 정밀하게 보여줬다. 연구팀은 358명을 대상으로 재평가와 관련된 네 가지 뇌 시스템을 확인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편도체를 포함한 피질하 시스템은 재평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석을 바꿔도 몸의 원초적 반응 일부는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다. 재평가는 감정을 지우는 게 아니라, 감정의 경로를 바꾸는 것에 가깝다.


재평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아니다

"다 잘 될 거야", "이건 사실 좋은 일이야" 처럼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긍정은 재평가가 아니다. 재평가의 핵심은 가능한 해석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은 오늘 상사에게 날카로운 피드백을 받았다. 이 상황에 대해 당신은 "상사가 나를 싫어한다"고 볼 수도 있고, "이 정도로 피드백을 해 준다는 건 내가 잘 되길 바라고, 내 일이 잘 마무리되길 바라는 거다"라고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더 정확한지는 물론 맥락에 따라 다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두 번째 해석이 떠오를 가능성조차 없는 사람은 인지적으로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선택지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별 후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 관계가 잘 맞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볼 수도 있다. 재평가는 거짓 위안을 만드는 게 아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해석의 습관

라자루스와 그로스의 연구는 공통적으로, 감정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정확히는 감정 자체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감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개입할 여지가 있다.


그 여지는 우리가 하는 해석에 있다. 이것이 위협인가 도전인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해석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는가?


이 질문들을 던지는 습관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같은 사건 앞에서 전혀 다른 감정 경험을 하게 된다. 감정을 소화하는 능력의 차이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해석의 습관에서 온다.




참고문헌

Bo, K., Kraynak, T. E., Kwon, M., Sun, M., Gianaros, P. J., & Wager, T. D. (2024). A systems identification approach using Bayes factors to deconstruct the brain bases of emotion regulation. Nature Neuroscience, 27(5), 975–987.

Gross, J. J. (2001). Emotion regulation in adulthood: Timing is everything.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10(6), 214–219.

Gross, J. J., & John, O. P. (2003). Individual differences in two emotion regulation processes: Implications for affect, relationships, and well-being.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85(2), 348–362.

Lazarus, R. S. (1991). Emotion and adapt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Lazarus, R. S., & Folkman, S. (1984). Stress, appraisal, and coping. Spr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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