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세요

말할 수 없는 감정은 다루기도 어렵다

by 사심가득

코칭에서 만난 한 피코치의 이야기다. 미국 유학이 확정되어 출국을 앞두고 있었는데, 영어 회화가 너무 걱정된다고 했다. 회화 앱도 쓰고, 친구와 스터디도 하고, 꽤 많은 시간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눠보면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물었다. "미국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처음엔 "그냥 불안하고 부정적인 것 같아요"라고만 했다. 그런데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조심스럽게 한 단어를 꺼냈다. "두려움인 것 같아요."


회기가 끝날 무렵, 그가 말했다. "오늘 인상적이었던 건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꺼낸 거예요. 말하고 나니까 왠지 좀 가벼워졌어요."


영어 회화 실력이 달라진 것도, 출국 날짜가 바뀐 것도 아니었다. 달라진 것은 막연하게 뭉쳐 있던 감정에 이름이 붙었다는 것뿐이었다. 왜 이름 하나가 이런 변화를 만들었을까?




감정을 세밀하게 구분하는 능력

심리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사람마다 감정을 구분하는 정밀도가 다르다는 것을 연구해왔다. 그는 이것을 감정 세분화(emotional granularity)라고 부른다.


감정 세분화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정밀하게 구분한다. 그냥 "기분이 나쁘다"가 아니라, 지금 느끼는 것이 분노인지 실망인지 수치심인지 외로움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기분이 좋다"도 마찬가지다. 기쁨인지, 안도인지, 자부심인지, 설레임인지를 따로 느낀다.


반면 감정 세분화가 낮은 사람은 비슷한 감정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서 경험한다. 분노도, 두려움도, 좌절도, 외로움도 전부 "기분 나쁨"으로 뭉뚱그려진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파란색의 미묘한 차이를 수십 가지로 구분하는 반면, 일반인에게는 그냥 다 파란색인 것처럼. 감정도 훈련과 언어에 따라 얼마나 세밀하게 보이느냐가 달라진다.




이름이 없으면 다루기도 어렵다

감정 세분화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자기를 잘 표현하는 게 좋기 때문은 아니다.


배럿과 동료들의 연구에 따르면, 감정을 더 세밀하게 구분하는 사람들은 강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폭음이나 공격적인 행동, 자해 같은 부적응적인 방식으로 대처하는 경향이 적었다. 병원을 찾는 횟수도 적었고, 약을 덜 복용했으며, 우울과 불안 수준도 낮았다.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순간, 뇌는 그 감정에 맞는 대응 방식을 찾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기분 나쁨"이라는 큰 덩어리 앞에서는 뇌도 막막하다고 느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외로움"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뇌는 즉각 관계와 관련한 부위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억울함"이라면 억울함을 풀 방법을 찾고, "두려움"이라면 그 두려움의 원인을 향해 주의가 향한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단순히 라벨지를 오려 붙이는 게 아니다. 감정을 처리하는 방향을 안내해 주는 가이드가 생기는 것이다.




언어가 감정을 만든다

감정 세분화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언어다.


배럿은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이 상당 부분 우리가 가진 감정 어휘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름이 있는 감정은 더 잘 감지된다. 이름이 없는 감정은 막연한 불쾌함이나 불편함으로 경험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어에는 '木漏れ日(코모레비)'라는 단어가 있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어를 아는 사람은 그 장면을 마주쳤을 때 단순히 "밝다"가 아닌 특별한 무언가로 인식한다. 포르투갈어의 '사우다지(saudade)'는 그리움과 슬픔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인데, 이 단어를 가진 사람들은 그 감정 상태를 더 선명하게 경험한다고 알려져 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감정 어휘가 넓을수록, 내 감정 경험은 더 풍부하고 정확해진다. 반대로 감정 어휘가 빈약하면, 실제로는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어도 뭉뚱그려진 "기분 나쁨"만 경험된다.




감정 어휘를 늘리는 것

가장 단순한 방법은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이다. 소설을 읽거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글을 접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일기로 쓰면서 더 정확한 단어를 찾으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어제의 "기분 나쁨"을 오늘은 "실망감"으로, 내일은 "배신감"이나 "허탈감"으로 더 정확하게 짚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처음의 피코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많은 회화 연습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었다.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꺼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과 마주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다. 이름이 붙는 순간, 그 감정은 더 이상 뿌연 안개가 아니라 마주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감정을 안다는 것은 감정을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감정을 정확한 언어로 포착하는 것까지가 감정을 아는 일이다.




참고문헌

Barrett, L. F., Gross, J., Christensen, T. C., & Benvenuto, M. (2001). Knowing what you're feeling and knowing what to do about it: Mapping the relation between emotion differentiation and emotion regulation. Cognition & Emotion, 15(6), 713–724.

Kashdan, T. B., Barrett, L. F., & McKnight, P. E. (2015). Unpacking emotion differentiation: Transforming unpleasant experience by perceiving distinctions in negativity.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24(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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