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썬 어렵나요? 꼭 배워야하나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은 프로그래밍 언어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그렇듯, 프로그래밍 언어도 수백 가지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바로 파이썬(Python)일 것이다.
2026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프로그래밍 언어.
AI, 데이터 과학, 웹 개발, 자동화—손대지 않는 분야가 없다.
ChatGPT도, 알파고도, 자율주행차의 두뇌도 파이썬 위에서 만들어졌다.
긴 세월에 걸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인간의 언어와 달리, 프로그래밍 언어는 대개 천재적인 개발자 한 사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중에서도 파이썬의 탄생과 발전은 상당히 독특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휴가 중에 심심해서 만들었지만, AI 시대를 연 주역이 되어버린 언어 '파이썬'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자.
1989년 크리스마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귀도 반 로섬(Guido van Rossum)이라는 젊은 프로그래머가 휴가 중에 할 일이 없었다.
당시 그가 참여하던 ABC라는 교육용 언어는 좋은 아이디어를 품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쓰기엔 너무 제한적이었다.
"ABC의 좋은 점은 살리되, 진짜 쓸 수 있는 언어를 만들면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이 케이크를 먹고 가족과 시간을 보낼 때, 귀도는 새 언어의 첫 코드를 쓰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 코딩이라니! 공대생!!
지난 글에서 소개한 '자바스크립트'가 10일간의 불면 속에서 급조된 것과 대조적으로, 파이썬은 여유로운 휴가의 산물이다. 귀도 스스로도 이 프로젝트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어로 발전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https://brunch.co.kr/@teumlab/63
파이썬에는 '파이썬의 선(The Zen of Python)'이라는 텍스트를 표시하는 숨겨진 기능이 있다.
Beautiful is better than ugly.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보다 낫다.
Simple is better than complex.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보다 낫다.
Readability counts.
가독성이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파이썬이라는 언어의 설계 원칙 그 자체.
대부분의 언어가 중괄호 {}로 코드를 구분할 때, 파이썬은 들여 쓰기를 강제했다.
개발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거 아냐?"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개발자들은 코웃음을 쳤다. 괄호와 기호가 난무하는 프로그램 언어의 세계에서는 상당히 도전적인 문법이었던 것.
하지만 이 선택이 파이썬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코드가 곧 문서가 되고, 문서가 곧 코드가 된다는, 장점은 파이썬을 프로그래머뿐 아니라 과학자, 수학자, 분석가들에게까지 퍼뜨린 결정적 이유다.
파이썬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는 속도였다.
C나 자바처럼 속도에 최적화된 전통적인 프로그래밍 언어에 비하면 파이썬은 느리다.
엄청나게 느리다. 같은 작업을 수행하는 데 수십 배의 차이가 날 정도로.
캐나다 대학에서 내가 막 컴퓨터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1학년 때는 가장 쉬운 '연습용' 언어인 파이썬으로 프로그래밍의 개념을 배웠다. 그 시절까지만 해도, 파이썬이란 언어의 속도 때문에 복잡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는 초보자용으로 한정된 언어라는 인식이 강했던 기억이 난다.
"느린 언어가 어떻게 세계 1위가 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사람의 시간'이 '컴퓨터의 시간'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시간은 해마다 비싸지는데, 컴퓨터의 시간은 해마다 가격이 내려간다.
다른 언어로 하루 걸리는 개발을 파이썬으로는 두 시간 만에 끝낼 수 있다.
컴퓨터가 1분 더 계산하는 건 전기값 몇 원이지만, 개발자가 하루 더 일하는 건 수십만 원이다.
그리고 파이썬은 '느림'을 해결하는 독특한 방법을 택했다.
자기가 직접 달리지 않고, 빠른 녀석을 불러다 시키는 것이다.
파이썬의 핵심 기능과 도구들의 내부는 사실 C나 C++로 작성되어 있고, 단지 이들을 우아하게 연결하는 '접착제(glue)' 역할을 한다.
다 외주를 주는 거면, 결국 디지털 세상의 주인공은 여전히 54년 된 C언어 아닌가!?
https://brunch.co.kr/@teumlab/23
식당으로 비유하면, 파이썬은 직접 요리하지 않는 총주방장이다.
레시피를 설계하고, 최고의 요리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완성된 접시를 손님에게 내보낸다.
정작 불 앞에 서는 건 C와 같이 빠르고 어려운 언어들이지만, 주방 전체를 움직이는 건 파이썬이다.
2026년 현재, AI 세계에서 파이썬은 사실상의 공용어다.
왜 하필 파이썬이었을까?
AI의 뿌리는 수학과 통계학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프로그래머가 아니었다.
복잡한 언어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고, 파이썬은 수학 공식을 거의 그대로 코드로 옮길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었다. 한 명의 연구자가 파이썬으로 결과를 공유하면, 다른 연구자도 파이썬을 쓴다.
더 흥미로운 건, AI가 코드를 짜는 시대가 왔는데, AI가 가장 잘 다루는 언어도 파이썬이라는 것.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이니, AI가 가장 상세히 학습한 언어이기도 하다.
AI를 만드는 것도 파이썬이고, AI가 만드는 것도 파이썬이다. 무한한 자기 참조
그렇다면 2026년에 프로그래밍 언어를 딱 하나만 배울 수 있다면, 무엇을 배워야 할까?
AI를 이해하고 싶다면, 데이터를 다루고 싶다면, 자동화로 반복 작업을 없애고 싶다면—파이썬이다.
AI 에이전트를 만들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빠르게 프로토타입하는 데 이보다 좋은 출발점은 없다.
반면, 눈에 보이는 웹사이트나 앱을 직접 만들고 싶다면—자바스크립트다.
화면을 디자인하고, 버튼을 누르면 반응하는 인터랙티브한 경험을 만드는 건 자바스크립트의 영역이다.
파이썬이 AI의 두뇌를 만든다면, 자바스크립트는 그 두뇌가 사용자와 만나는 얼굴을 만든다.
결국 둘 다 필요한 세상이지만, AI를 다루는 첫걸음으로는 파이썬이 가장 확실한 선택이다.
자바스크립트가 10일간의 압박 속에서 웹의 공용어가 되었다면, 파이썬은 크리스마스의 여유 속에서 AI의 모국어가 되었다.
둘 다 완벽한 출발은 아니었다.
자바스크립트는 "장난감 언어"라 불렸고, 파이썬은 "느림보"라 무시당했다.
하지만 결국 세상을 바꾼 건 완벽함이 아니라, 꾸준히 문제를 풀어나가는 집요함이었다.
AI 에이전트가 우리 대신 코드를 짜고,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되고, 과학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발견이 쏟아지는 그 미래의 한복판에, 사람은 앞으로 코딩을 배워야 할까 고민이 많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굳이 하나를 배워야 한다면 파이썬을 선택하는 게, 미래의 AI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