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의 젠슨 황 이야기 -
데니스부터 깐부치킨까지

AI 시대를 연 젠슨 황. 우연 같은 성공, 32년간의 필연

by TEUM Lab

한국인이 아닌데, 왠지 한국 기업가보다 더 친숙한 얼굴이 몇 명 있다.

그중 하나가 엔비디아(NVIDIA)의 CEO 젠슨 황(Jensen Huang).


1990년대 후반, 한국에서 PC방 붐이 일면서 그래픽카드 수요가 폭발하자, 아직 무명이던 엔비디아의 젠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직접 서울 용산 전자상가를 누비며 거래처를 늘리기 위해 발로 뛰었다.

게임에 관심이 없던 분들은 AI 붐을 타고 비교적 최근에야 엔비디아라는 이름을 들었겠지만, 오래된 PC 게임 마니아들 사이에서 엔비디아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회사이다.


그런 젠슨 황이 작년 말, 어쩌면 몇십 년 후에 전설처럼 남을지도 모를 장면을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의 수장과, 한국에서 가장 큰 두 회사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인 '깐부 회동'.

이 자리에서 엔비디아는 한국 기업들에 GPU 26만 장 공급을 약속했고, 젠슨은 "삼성과 SK하이닉스는 HBM 97세대까지 함께할 파트너"라고 선언했다.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자들이 소박한 치킨집이라니 어딘가 어울리지 않지만, 젠슨 황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묘하게 납득이 가는 장소다.




최고로 멋진 게임을 위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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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캘리포니아 산호세의 로드사이드에 자리한 '데니스(Denny's)'에서 세 남자가 만났다.

크리스 말라코스키(Chris Malachowsky), 커티스 프리엠(Curtis Priem), 그리고 젠슨 황.


데니스는 미국 전역 어디에나 있는 24시간 영업하는 체인점으로, 워낙 편리하고 저렴해서 나도 캐나다에 살 땐, 집 근처 데니스를 애용하곤 했다.


세 남자는 하루 종일 커피를 리필하며, 미래의 게임 산업에 관해 열띤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데니스는 커피가 무한 리필이다. 쓸데없는 정보라 삭제함.


"앞으로는 3D의 시대다!"


인공지능? 세계의 데이터센터를 지배하겠다고?

안타깝게도 인공지능은 마침 길고 긴 '한겨울'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고, 그들은 그저 컴퓨터 게임을 최고로 멋지게 3D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첫 번째 실패와 GPU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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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스토리의 클리쉐를 답습하듯, 야심 차게 출시한 첫 제품 'NV1'은 실패했다.


NV1에 영감을 준 세가의 '버추어 파이터'는 세계 최초의 3D 격투 게임으로, 게임 업계 전체에 3D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엔비디아는 이 게임을 PC에서 돌리겠다는 야심 찬 전략으로 NV1을 설계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DirectX의 표준을 삼각형으로 확정하면서, '2차 곡면'이라는 방식에 특화된 NV1는 하루아침에 고립되었다.


도산 직전.

직원을 해고해야 하는 밤, 젠슨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뜻밖의 구원의 손길이 일본에서 건너왔다.

당시 일본의 게임 회사인 세가(SEGA)는 차세대 게임기 '드림캐스트'에 꼭 필요한 그래픽 카드를 찾고 있었고, 엔비디아에 백지수표를 건넸다. 하지만 1년 넘는 개발 끝에 엔비디아의 독자 기술은 업계 표준과 맞물리지 않았고, 계약은 파기됐다.


그런데 세가의 이리마지리 쇼이치로 사장은

"젠슨이라는 젊은이가 마음에 들었다."

라고 말하며 계약금 500만 달러의 반환을 요구하지 않고, 그대로 '전별금'으로 남겨두기로 결정한다.


이 전별금을 밑천 삼아 엔비디아가 내놓은 그래픽 카드가 RIVA 128.

업계 표준을 받아들이고 성능에 집중한 결과, 이번에는 시장이 반응했다.

이어진 RIVA TNT까지 연달아 히트하며, 1999년에 그 기세를 몰아 내놓은 것이 바로 'GeForce 256'.


PC의 부품 중 하나로 취급받던 게임용 그래픽 카드를, 'GPU(Graphics Processing Unit, 그래픽 처리 장치)'라고 브랜딩하며 출시한 첫 제품이다.


하지만, 야심 차게 새로운 카테고리를 명명한 엔비디아 그 자신조차, GPU가 훗날 기계의 '지능'을 발현시키는 데 사용될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후일담으로, 세가는 500만 달러를 엔비디아의 지분으로 전환했고, 이리마지리가 퇴임한 뒤인 2000년에 세가는 그 지분을 약 1,500만 달러에 매각했다. 투자 대비 3배 수익이었지만, 만약 지금까지 세가가 그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더라면, 약 1조 달러(한화로 약 1400조 원)의 가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가 그룹의 현재 시가 총액은 한화로 약 5조 원...


2017년에는 은퇴한 이리마지리 전 사장이 젠슨에게, 일본의 소규모 비즈니스 리더 모임에서 강연해 달라고 부탁했고, 젠슨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엔비디아가 일본 게임 회사에게 구원을 받고, 한국에게 기술을 전수하던 일본 반도체 회사들이 이제는 한국과 대만에 뒤쳐진 2026년, 격세지감은 이럴 때 쓰는 사자성어인 것 같다.




AI의 두뇌로 진화한 G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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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엔비디아는 역사를 바꾸게 된 결정을 내린다.


"GPU를 그래픽 이외의 용도로도 쓸 수 있게 하자."

CUDA(쿠다)라고 이름 붙인 이 기술은, 게임용 칩을 과학자들이 쓰는 슈퍼컴퓨터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주주와 애널리스트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게이머한테 그런 기능은 필요 없다."

"반도체 낭비다."

실제로 첫 몇 년간 CUDA는 거의 수익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역사의 전환점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찾아온다.

2012년, 토론토 대학의 연구팀이 AI 이미지 인식 대회 'ImageNet'에서 압도적인 우승을 거두는데, 그들이 사용한 건 고가의 슈퍼컴퓨터가 아니었다. 용산 전자상가에서도 살 수 있을 법한 GeForce 그래픽카드 두 장.

'고양이'를 인식하는 데 필요한 방대한 행렬 연산.

그것이 좀비를 렌더링 하는 연산과 수학적으로 똑같았던 것이다.

이 순간, GPU는 '게이머들의 도구'에서 'AI의 두뇌'로 진화했다.


지난 편에 소개한 파이썬이 '느린 언어'라는 조롱을 뒤집고 AI의 모국어가 되었듯, GPU도 '게임용'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AI의 두뇌가 되었다.


https://brunch.co.kr/@teumlab/81




세계 1위의 자리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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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대로다.


머신러닝으로 인한 AI의 부흥.

ChatGPT가 일으킨 생성형 AI의 광기.

그에 힘입어 2024년, 엔비디아는 세계 시가총액 1위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용산에서 고군분투하며 영업을 뛰던 젠슨 황은, 세계 최고의 CEO가 되어, 2025년 서울의 한 치킨집으로 들어간다.

전문 경영인의 비율이 높은 미국에서, 젠슨은 가장 오래 CEO 자리를 지키고 있는 창업자 중 하나이다.

그가 내렸던 수많은 결정들은, 전문 경영인이었다면 주주와 애널리스트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 계산이 필요해질 날이 온다."

그 '언젠가'는 매번 와주었고, 그때마다 엔비디아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공은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은 필연의 연속이었다.


AI 에이전트가 우리를 대신해 일하고,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달리고, 신약 개발의 시뮬레이션이 몇 시간 만에 끝나는 시대.

우리 인간에게 남겨진 사명은, 빅데이터나 논리적인 사고에 의한 확률적인 결정이 아니라, 경험과 직관을 통해 남들이 모두 반대하는 무모한 시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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