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같은 물과 거인 같은 나무들의 대화
웨일스의 거친 협곡과 코츠월드의 꿀색 마을을 지나, 우리는 서식스(Sussex)의 '셰필드 파크(Sheffield Park and Garden)'에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공기의 무게가 달랐습니다. 이곳은 모든 소음이 흡수된 듯 고요했습니다. 눈앞에는 거대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는데, 바람 한 점 없는 수면은 마치 잘 닦인 거울 같았습니다.
하늘의 구름, 호숫가의 나무,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네오고딕 양식의 저택까지. 물 위에는 또 하나의 완벽한 세상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몽환적인 풍경.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 거대한 '데칼코마니(Decalcomanie)'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저는 의사로서 늘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합니다. X-ray나 MRI 같은 흑백의 사진 속에서, 흐릿한 그림자를 보고 병을 찾아내야 하죠. 제 눈은 늘 '문제(Problem)'를 찾는 것에 훈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셰필드 파크의 호수는 달랐습니다. 물에 비친 풍경은 흐릿함 없이 선명했고, 그 안에는 병이나 상처 대신 오직 자연의 완벽한 색채만이 가득했습니다.
붉은 단풍, 초록색 잎, 파란 하늘. 호수는 저에게 "무언가를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비춰보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진료실에서 날카롭게 세웠던 신경이, 이 부드러운 물결 앞에서 스르르 풀리는 기분. 호수는 내 마음속의 소란스러움까지 조용히 잠재워 주었습니다.
이토록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사실 이곳은 철저하게 계산된 '인공의 미(美)'입니다. 18세기 영국 최고의 조경가, '케이퍼빌리티 브라운(Capability Brown)'과 '험프리 렙턴(Humphry Repton)'이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래 있던 지형을 깎고 물길을 막아 4개의 거대한 호수를 만들고, 나무 하나하나의 위치까지 계산해 심었습니다. "가장 훌륭한 정원은, 인간의 손길이 닿았지만 마치 원래 자연인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그들의 철학대로, 셰필드 파크는 인공적인 티가 전혀 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준 것. 그 겸손하고도 위대한 계획 덕분에 수백 년 후의 우리가 이 풍경을 누리고 있는 것이겠죠.
호수 주변을 걷다 보면 또 한 번 압도당하게 됩니다. 바로 나무들의 크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챔피언 트리(Champion Tree, 동종 중 가장 크거나 오래된 나무)'를 보유한 곳입니다. 어른 몇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는 거대한 나무들. 그 아래 서 있으면 우리는 마치 소인국에 온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아이들은 거인 같은 나무뿌리 사이를 다람쥐처럼 뛰어다녔습니다.
수백 년을 한자리에서 버텨온 거목들이 주는 묵직한 위로. 작은 인간의 고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나무들은 그저 묵묵히 그늘을 내어주었습니다. 바이버리에서 느꼈던 아기자기한 행복과는 또 다른, 거대한 자연이 주는 웅장한 평화가 제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Dr. Myong's Reflection Tip: 셰필드 파크
반영(Reflection) 사진: 바람이 없는 맑은 날, 호수는 완벽한 거울이 됩니다. 특히 첫 번째 호수(Top Lake)에서 저택을 배경으로 찍는 사진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가을의 전설: 셰필드 파크는 가을 단풍이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힙니다. 10월~11월에 방문한다면 불타는 듯한 붉은색의 향연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계절도 충분히 멋집니다.)
블루벨 레일웨이(Bluebell Railway): 셰필드 파크 바로 옆에는 증기기관차가 다니는 기차역이 있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옛날 기차를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거울 같은 호수 위에 우리 가족의 투명해진 마음을 비춰본 시간을 뒤로하고, 다음은 영국 정원의 정수라 불리는 예술적인 공간으로 향합니다.
단순한 꽃밭이 아닙니다. 나무로 벽을 세우고 하늘을 지붕 삼아 지은 '초록색 미로'이자 '비밀의 방'. 시싱허스트의 순백과는 또 다른, 강렬한 붉은색 꽃들의 열정이 살아 숨 쉬는 곳.
식물 수집가가 설계한 가장 건축적인 정원, '히드코트 매너 가든(Hidcote Manor Garden)'이 우리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