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되살아난 영화 같은 저택
히드코트의 초록색 미로를 지나, 옥스퍼드셔(Oxfordshire) 근처의 '배질던 파크(Basildon Park)'에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려 저택을 마주하는 순간,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황금빛 돌로 지어진 우아한 기둥, 좌우 대칭이 완벽한 팔라디안 양식의 건물. 18세기 조지언 양식의 우아한 대칭미와 따뜻한 황금빛 돌벽은,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품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맞다! 그 영화!" 바로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 <오만과 편견(2005)>에서 빙리 씨의 저택, '네더필드 파크'로 나왔던 곳입니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춤을 추던 그 화려한 무도회장. 스크린 속 환상이 3차원의 현실로 튀어나온 순간, 제 심장도 영화의 OST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이 춤을 추고, 촛불이 일렁이는 무도회의 밤. 영화 속 엘리자베스가 되어, 혹은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다아시가 되어 저택을 거니는 기분은 꽤나 짜릿했습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Bridgerton)>의 페더링턴 가문 정원 파티 촬영지로도 쓰였다고 하니, 이곳은 그야말로 '로맨스 시대극'의 성지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배질던 파크의 진짜 감동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에 있습니다. 사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완전히 망가져 철거 위기에 놓였던 '폐허'였습니다. 지붕은 무너지고 창문은 깨져 유령이 나올 것 같았죠. 그런데 1950년대, 일 리프 경(Lord and Lady Iliffe) 부부가 이 폐허를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이 집을 하나하나 고치고 되살려냈습니다. 내부에는 18세기 고가구뿐만 아니라, 부부가 살았던 1950년대 스타일의 주방과 욕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오래된 것을 부수고 새것을 짓는 대신, 상처 입은 과거를 보듬어 다시 생명을 불어넣은 부부의 사랑. 그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 화려한 영화 세트장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곳의 백미라는 화려한 무도회장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방문했을 때 건물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망은 잠시뿐이었습니다. 닫힌 문 덕분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저택을 감싸고 있는 정원과 광활한 영지(Parkland)로 향했기 때문입니다.
배질던 파크의 진가는 저택 건물 그 자체가 아니라, 건물이 놓인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내부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우리는 저택 주변의 산책로를 더 깊숙이, 더 여유롭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저택 주변으로는 라벤더, 장미, 색색의 꽃들로 둘러쌓여 있었고, 곳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저택을 둘러싼 꽃들의 향연에 festa를 즐겼습니다.
정해진 관람 동선을 따라 조심조심 걷는 박물관 같은 내부 관람보다, 저택의 웅장한 외벽을 배경 삼아 탁 트인 들판을 산책하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떼들을 바라보면 걷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는 훨씬 큰 해방감을 주었습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템스 계곡(Thames Valley)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고전 풍경화 같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 시설로 쓰이며 폐허가 될 뻔했던 이 영지가 다시 이토록 평화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웅장한 기둥들 사이를 지나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우리는 스크린 속 주인공들이 누렸을 법한 호사스러운 고요를 독차지했습니다.
배질던 파크의 거대한 화려함에 취해 있다가 차로 20분쯤 달렸을까요. 우리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그레이스 코트(Greys Court)'에 닿았습니다. 배질던이 멀리서 감상하는 '황금빛 웅장함'이라면, 이곳은 당장이라도 들어가 차 한 잔을 나누고 싶은 '다정한 생활미'가 흐르는 곳입니다.
배질던 파크에서 시야가 탁 트이는 시원함을 맛보았다면, 그레이스 코트에서는 정교하게 나누어진 정원 벽 사이사이를 탐험하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아늑함을 느낄 차례였습니다.
그레이스 코트의 백미는 벽으로 둘러싸인 여러 개의 '월 가든(Walled Gardens)'입니다. 문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오래된 등나무가 벽을 타고 흐르는 정원, 향기로운 장미가 가득한 정원, 그리고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주방 정원(Kitchen Garden)까지. 배질던의 초지가 거대한 캔버스였다면, 이곳은 정성껏 수놓은 작은 손수건 같았습니다.
영화 속 리지(엘리자베스)가 드레스를 휘날리며 뛰어갔을 것 같은 배질던 파크의 광활한 초지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그레이스 코트의 아늑한 정원에서 마음을 정리했던 하루. 이 두 곳의 극명한 대비는 우리 여행에 잊지 못할 리듬감을 선물했습니다.
"웅장한 것도 좋지만, 난 이렇게 다정한 정원이 더 마음이 가네."
제 말에 아이들은 어느새 정원 한구석에서 찾은 작은 꽃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있었습니다.
대저택의 외관이 주는 영감과 비밀 정원이 주는 위로. 이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하고 나니, 이제야 영국의 정취를 온전히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화려한 영화 속 주인공보다, 이 평화로운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의 마음을 더 닮아있었습니다.
그레이스 코트의 초지의 양과 소들이 드넓은 초원에서 평화롭게 거니는 모습은 평온함 그 자체 였고, 이 모습이 익숙하다고 느낄 즈음. 우린 이제 영국 생활에 적응 하고 있구나 했습니다.
영화 다시 보기: 방문 전에 영화 <오만과 편견(2005)>이나 드라마 <브리저튼> 시즌 2를 보고 가시면 감동이 200배가 됩니다. "아! 저기서 그 장면 찍었구나!" 하고 찾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1950년대 주방: 화려한 응접실도 좋지만, 1층에 있는 1950년대식 레트로 주방을 놓치지 마세요. 당시의 믹서기나 식기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입니다.
공원 산책: 저택 구경 후에는 건물 뒤편으로 이어진 숲길 산책로(Parkland Walk)를 꼭 걸어보세요. 가을 단풍이 특히 아름답습니다.
그레이스 코트의 웰(Well): 정원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당나귀 바퀴(Donkey Wheel)가 있는 우물을 꼭 확인해 보세요. 아이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역사 공부가 됩니다.
산책의 조화: 배질던에서는 '시야'를 즐기고, 그레이스 코트에서는 '향기'와 '디테일'을 즐기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되었던 설렘을 뒤로하고, 다음 주는 화려함보다는 '편안함'이 가득한 곳으로 떠납니다.
여행이라기보다 일상처럼, 가장 많이 출근 도장을 찍었던 나의 최애 장소. 서리 힐스의 풍경을 앞마당 삼아 돗자리를 펴고 누웠던 곳, '폴스덴 레이시(Polesden Lacey)'가 우리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