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유치원과 태양광 전자시계

1부. 말하자면... 불행한 가족사

by 숨나

동생 승이가 백일을 맞던 날, 제주시 시내의 낡은 사진관은 이른 아침부터 작은 소동으로 들썩였다. 아기 의자가 비좁아 승이의 포동포동한 발이 툭 튀어나왔고,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던 사진관 주인은 난감한 듯 두 팔을 벌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 아이는 아기 의자에는 도저히 못 앉히겠는데요. 장군감이 아니라 진짜 장군입니다.”

결국 묵직한 어른용 나무 의자 하나가 스튜디오 한복판으로 끌려왔다. 엄마는 그 위에 청록색 비단 포대기를 겹겹이 접어 곱게 깔았다. 반짝이는 비단 위에 앉은 동생은 마치 전장에서 승전보를 들고 돌아온 장수처럼 당당하게 두 손을 의자 팔걸이 위에 올리고 웃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일 때마다, 엄마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숨을 참아냈다. 저 아이가 우리 집안의 굽은 운명을 펴줄 것이라는 기도가 그 숨결 속에 섞여 있었다.

시간은 유수와 같아, 승이는 그 이름처럼 거침없이 자라났다. 유치원 입학 첫날, 노란 가방을 멘 동생의 어깨 위로 눈부신 제주 햇살이 잘게 부서졌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던 승이는 대문을 나서는 걸음걸이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현관 기둥 뒤에 서서 멀어지는 그 노란 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 어딘가가 뾰족한 가시바람에 닿은 듯, 생경한 쓰라림이 몰려왔다.

우리 다섯 형제자매 중, 유치원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일본에서 신발 공장을 하던 시절, 언니들은 매일 단정한 원복을 입고 유치원 가방을 흔들며 다녔다. 하지만 네 살에 쫓기듯 고향으로 돌아온 내게 ‘가난’은 가장 견고하고 높은 문턱이 되어 앞길을 막아섰다. 내 작은 발은 늘 그 차가운 문턱 앞에서 멈춰 서야만 했다.

나는 그 서러움을 일찍부터 나만의 무기로 삼을 줄 아는 조숙하고도 영악한 아이였다. 무언가 갖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나는 주문처럼, 혹은 비수처럼 그 말을 내뱉었다.

“치, 나만 유치원 못 갔잖아. 나만 아무것도 몰라. 내가 바보가 돼도 다 엄마 탓이야.”

그럴 때마다 엄마의 눈동자는 파들 거리며 가늘게 흔들렸다. 나는 그 죄책감의 틈새를 타 작은 전리품들을 챙겼다. 새 운동화, 꽃무늬 필통, 혹은 머리칼을 쨍하게 잡아주는 붉은 리본 머리핀 같은 것들. 나는 열 살이 될 때까지 그 비겁하고도 슬픈 주문을 만능열쇠처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손목에 묵직하고 검은 시계 하나가 채워졌다. 투박한 플라스틱 밴드와 네모난 액정 안에서 노란색 숫자들이 점점이 반짝이는 태양광 전자시계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번지던 유행이었고, 매일 ‘유치원 결핍’을 외치며 떼쓰는 막내딸이 안쓰러웠던 엄마가 큰맘 먹고 오일장에서 사 오신 것이었다.

“이건 건전지가 없어도 된단다. 햇빛만 있으면 스스로 몸을 채워 움직이는 놈이지.”

아빠의 설명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죽어 있는 기계가 태양의 빛을 먹고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그것은 공학이 아니라 마법에 가까웠다. 그날 이후, 나의 종교는 옥상이 되었다.

나는 매일 오후가 되면 아크릴 실로 엮은 빨랫줄 사이, 빨래집게로 시계를 조심스레 걸어두었다. 햇볕이 시곗줄을 타고 액정 안으로 스며들어 숫자의 농도가 짙어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0에서 1로, 숫자가 미세하게 깜박이며 바뀔 때마다 내 마음의 멈춰 있던 태엽도 함께 감기는 것 같았다.
시계를 다시 손목에 찰 때 느껴지는 서늘하고 단단한 플라스틱의 감촉이 좋았다. 정각마다 울리는 ‘삐삐’ 소리는 고요한 내면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같았다. 그 짧은 진동 속에서 세상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비로소 나란히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들은 장난스럽게 나를 에워싸고 놀려댔다.


“야, 너 그 시계도 유치원 안 갔다고 엄마 협박해서 뺏어낸 거지? 도둑놈 시계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액정을 닦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달라. 이건 남이 준 게 아니라 내가 빛으로 직접 충전한 거야. 내 힘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라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입가에 낯선 미소가 번졌다. 가난의 눅눅한 그늘도, 언니들의 장난도 닿지 못하는 나만의 독립된 영토.

햇살이 유난히 뜨거운 오후면 나는 옥상 시멘트 바닥 위에 맨발을 올렸다. 발바닥이 지글거리며 달궈졌지만, 내 시계의 액정은 그 어떤 원복보다 눈부시게 빛났다.
그날 나는 결심했다. 이 시계가 나의 노란색 유치원 가방이라고. 배운 글자도, 나눠주는 간식도, 인자한 선생님의 목소리도 없었지만, 1초마다 눈금이 바뀌는 그 정직한 흐름이 나를 가르치고 길러주는 위대한 스승이었다.


시계는 오랫동안 내 왼쪽 손목의 일부처럼 붙어 있었다. 언제 그것을 잃어버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산책 중에 흘렸을 수도, 어느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가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기억 속에서 시계의 외형은 흐릿해졌지만, 그 묵직한 무게와 온도는 여전히 내 손목 안쪽 맥박이 뛰는 자리에 문신처럼 남아 있다.


햇빛이 닿을 때마다 죽어 있던 숫자들이 다시 깨어나던 그 신비로운 생명력. 나는 그 숫자들이 태어나는 순간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비로소 입을 다무는 법을 배웠다. 어쩌면 그 시계는 내게 시간을 읽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구걸하거나 빌리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정오’를 선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삐삐—


정각의 소리가 공기 속으로 흩어질 때마다 내 안의 묵은 원망도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나는 더 이상 유치원에 가지 못한 나를 가여워하지 않았고, 엄마의 목을 죄던 무기도 내려놓았다.
태양광 전자시계는 이제 전설처럼 사라졌지만, 창가에 햇빛이 길게 드리우는 오후면 내 손목에는 미세한 온기가 일렁인다.

바람이 불어오면 그해 옥상의 마른빨래 냄새와 내 손목에 매달려 있던 검은 시계줄의 광택이 눈앞을 스친다. 유치원이라는 커다란 문턱이 드디어 내게도 평등한 시간의 한 칸으로, 눈부시게 열렸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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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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