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삶이 나를 완성하다
28년 동안 내가 마주한 것은 환자의 차트만이 아니었다. 그곳엔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의 고백이 있었고, 어린 자녀를 둔 엄마의 절규가 있었으며, 다시 숨을 쉬게 된 이의 환희가 있었다. 병원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 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눈부신 찰나들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간호사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직무유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환자의 심장 소리를 듣던 청진기 대신, 그들의 삶을 문장으로 옮기는 펜을 들기로 했다.
처음에는 서툴렀다. 논문의 딱딱한 문체에 익숙해진 손가락으로 감성적인 에세이를 쓰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브런치 스토리' 작가로 데뷔하여 나의 진솔한 에피소드들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병원의 현실과 간호의 가치를 세상에 타전했다.
모니터 너머에서 들려오는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작가님 글을 읽고 다시 힘을 냈어요", "간호사라는 직업의 숭고함을 다시 봅니다"라는 댓글들은 내 연봉의 숫자보다 더 큰 가치로 다가왔다. 다양한 공모전에 글을 기고하며 낙방의 쓴맛도 보았지만, 그 과정조차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수련의 시간이었다. 글을 쓰며 나는 비로소 30년 임상 경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간호사 박지숙을 넘어 '작가 박지숙'으로 한 단계 더 성장했다.
누군가는 교액연봉이라는 숫자에 주목하며 성공의 정점에 섰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 진정한 성공은 그 숫자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봉에 걸맞은 '품격과 영향력'을 갖추는 일이다.
전문간호사이자 박사로서 쌓아온 지식은 글이라는 옷을 입었을 때 비로소 대중에게 전달되는 생명력을 얻는다. 내가 쓰는 한 편의 글이 후배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대중에게는 의료 질 향상의 필요성을 알리는 목소리가 된다. '고액 연봉의 전문직'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더해졌을 때, 나의 커리어는 비로소 완성형에 가까워졌다.
오늘도 나는 데이 근무를 마치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 낮에는 환자의 안전을 위해 연구하고, 밤에는 그들의 삶을 위해 글을 쓴다. 병원 안팎을 종횡무진하는 이 분주한 일상은 나를 지치게 하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 길은 여전히 설레고 두렵다. 하지만 나는 안다. 상주의 작은 소녀가 박사 간호사가 되었듯, 매일 한 문장씩 진심을 꾹꾹 눌러 쓰는 이 걸음이 결국 한 권의 책으로, 그리고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한 줄의 문장으로 완성될 것임을.
성장은 결과가 아니라 태도다. 나는 오늘도 어제보다 조금 더 깊어진 문장을 쓰는, 성장하는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