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로 지은 집

독후 단상 02. 빨간 머리 앤/루시 모드 몽고메리

by 지하경

<빨간 머리 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앤이 대학에 합격해 집을 떠날 준비를 하며, 가족들의 분주함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매슈가 고른 옷감으로, 마릴라는 앤을 위한 드레스를 만든다. 앤은 그 드레스를 입고 마지막으로 시를 낭송한다. 그 순간, 마릴라는 눈물을 보인다.

“어렸을 적 네 모습이 생각났단다, 앤. 엉뚱한 짓을 해도 좋으니 계속 아이로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어느새 이렇게 커서 집을 떠나야 하다니. 너는 키도 크고, 맵시도 있고, 그 드레스를 입으니 아주… 아주 딴사람 같구나. 에이번리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쓸쓸해졌단다.”

마릴라는 감정을 절제하는 사람이다. 깊은 마음을 품는 것에도 죄의식을 느끼고, 크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의 진심 어린 고백은 울컥한 감동과 함께 허전한 쓸쓸함을 더 크게 전해준다. 마릴라와 매슈의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나는 이 장면을 정말 사랑한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아이를 키우며 내가 느끼는 감정과 겹쳐진다.
고단한 순간 사이사이에 스며 있는 사랑스러움, 후회와 한없는 애정이 교차한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은 기쁜 만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깃든다.

어린이집에 데리러 갔더니, 다섯 살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기회는 한 번이지만, 두 번 줄게.”

또 다른 날 밤, 아이는 투덜대며 말한다.
“아랫니가 그네처럼 흔들려.”
“엄마, 너무 불편해. 혀가 안에서 자야 하는데 위에서 자고 있어서 자꾸 놀잖아. 지금도 놀고 있어…”

양치를 시키다 입안의 치약 덩어리를 보고, 흔들리던 이를 빠진 줄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도 있다.
그 순간, 아이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여러 번 불러도 늦장을 부리다가 와서는,
“엄마, 이번에도 대답 안 했으면 우리 사이가 나빠질 뻔했지?” 하고 장난스레 말하던 넉살.

이런 말들과 순간들은 너무 짧아서, 붙잡지 않으면 금세 사라져 버린다.
어느새 꼬마였던 아이는 엄마 키만큼 자라고, 옷도 함께 입을 만큼 커버렸다.

육아는 매 순간 어려운 이유가 다르다.
해결책을 고민하게 되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확신 없는 말투로 묻게 된다.
하지만 매 순간 아이는 자라고, 부모인 나도 함께 성장한다.
이렇게 켜켜이 쌓이는 시간은 서로를 향한 시선이 담긴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언젠가 그 공간의 주인은 나이기도, 아이이기도 할 것이다.
아이들이 독립한 후에는 내가 그곳에 머물며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겠지.
그리고 내가 떠난 후에는 아이가 찾아와 추억하겠지.

마릴라처럼, 나 역시 아쉬움을 느낄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날을 위해, 나는 작은 기억들을 조각보처럼 모아 커다란 이불을 만들어둔다.
아이들이 자라 독립하게 되면, 지금의 작은 기억들은 더없이 따뜻하고 소중하게 남을 것이다.

오늘도 사소한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 다시 찾게 될 이 집에, 온기가 남아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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