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갑 대신 앞치마를 두른, 어느 경찰관 아빠의 기록

제 6화 치열함을 내려놓고 훌쩍 떠난 '제주 한 달 살이'

by 장경장

제 6화 치열함을 내려놓고 훌쩍 떠난 '제주 한 달 살이'


(부제: 시계를 멈춘 대자연 속에서 비로소 마주한 우리 가족의 진짜 속도)


​15번의 사직서,

투잡과 쓰리잡을 오가던 치열한 N잡러의 삶, 그리고 24시간 밤낮없이 비상사태가 터지는 경찰서까지.


내 인생은 언제나 배속을 한껏 높인 '빨리 감기' 상태였다. 남들보다 한 걸음이라도 더 앞서가야 한다는 강박, 멈추는 순간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분초를 쪼개며 긴장 속에서 살아온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은 포상이 아니라 오히려 낯설고 두려운 숙제처럼 느껴졌다.


​육아휴직의 하이라이트로 큰맘 먹고 감행한 제주도 한 달 살이. 하지만 돌담이 예쁜 단독주택에 짐을 푼 첫 며칠 동안, 나는 지독한 '속도 위반' 증후군에 시달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지만,

막상 스케줄표는 텅 비어 있었다.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노라면


"진짜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 "지금 이 시간에 뭔가 생산적인 걸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정체 모를 불안감과 죄책감이 나를 옥죄었다. 치열했던 도심의 때, 그리고 쉼 없이 달리던 습관적인 관성이 아직 하얗게 벗겨지지 않은 탓이었다.


​그 지독한 불안을 떨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첫 번째 루틴은 이른 아침의 러닝이었다.
높은 빌딩 하나 없이 나지막한 돌담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고즈넉한 제주의 시골 마을.


싱그러운 귤나무가 늘어선 좁고 굽이진 돌담길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뛰다 보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복잡하고 시끄러웠던 잡념들이 어느새 바닷바람에 씻겨나가듯 맑게 비워졌다.


​그리고 그 길에는 늘 나를 기다려주는 아주 특별한 '러닝메이트'가 있었다. 내가 숙소 대문을 나서는 소리만 들리면 어디선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나타나, 내 발걸음에 맞춰 함께 뛰어주던 이웃집 동네 똥개 녀석이었다.


가끔 내가 힘들어서 속도를 줄이면 녀석도 같이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며 "왜 안 와?" 하는 듯한 표정으로 기다려주곤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녀석을 내려다보며 헥헥거리는 맑은 눈망울을 마주할 때,

나는 비로소 낯선 곳에 대한 긴장을 풀고 무장해제되는 기분을 느꼈다.


낯선 섬 한복판에서 묘한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낄 뻔했던 초보 전업 아빠에게, 제주의 자연이 보내준 가장 따뜻하고 무해한 환영 인사였다.


​만약 우리가 3박 4일짜리 짧은 여행으로 왔다면, 우리는 여전히 도심의 속도를 버리지 못한 채 엑셀을 밟아가며 맛집과 핫플레이스를 찾아

'도장 깨기' 하듯 바쁘게 돌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 달이라는 길고도 마법 같은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과감히 손목시계를 풀어두고 거실 벽시계의 건전지를 빼버렸다.


그리고 철저히 자연의 속도와 아이들의 컨디션에 우리 가족의 하루를 맞추기 시작했다.

하루에 딱 한 곳, 혹은 딱 한 가지 계획만 세우고, 아이들이 힘들어하거나 지루해하면 미련 없이 숙소로 돌아와 거실 바닥에 뒹굴며 쉬거나 낮잠을 잤다. 계획에 쫓기지 않으니, 비로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제주도의 파도 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제주의 대자연은 그 자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놀이터였다.

피톤치드 가득한 숲길을 하염없이 걷다가 이름 모를 풀꽃을 관찰하고, 주황빛으로 잘 익은 감귤을 직접 따서 그 자리에서 까먹고,

난생처음 낙타와 말을 타보는 아이들의 눈망울은 매일 새로운 호기심과 설렘으로 빛이 났다.


도심에서는 늘 "조심해", "안 돼"를 입에 달고 살았던 우리 부부도, 이곳에서만큼은 "넘어져도 괜찮아", "마음껏 만져봐"라며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놓아줄 수 있었다.


​물론 그 넓고 관대한 자연 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아찔한(?) 코미디는 있었다.

어느 해변에서 모래놀이에 푹 빠져 있던 5살 첫째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쿵 넘어졌는데, 모래를 털어낼 새도 없이 입 주변에 잔뜩 묻은 모래를 혀로 낼름 먹어버린 것이다.


"안 돼!" 비명을 지르며 아내와 내가 달려가 허둥지둥 물로 입을 헹구고 난리를 피우자, 아이는 우왕좌왕하는 엄마 아빠의 다급한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꺄르르 웃으며 일부러 모래를 더 먹으려고 장난을 쳤다.


흙투성이가 된 채 입가에 모래를 묻히고 환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도심의 키즈카페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야생의 낭만과 해방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반전은 있었다. 제주의 아름다운 오름과 에메랄드빛 해변, 신비로운 숲길을 제치고 첫째가 뽑은 제주도 '원픽' 명소는 다름 아닌 '뽀로로 테마파크'였다.


대자연의 감동을 만끽하러 이 먼 곳까지 와서 결국 '뽀통령'이라니! 육지에도 흔하디흔한 테마파크지만, 제주의 엄청난 스케일 앞에 아이들은 완전히 매료되었다.


평소라면 낮잠을 잘 시간도 잊은 채,

테마파크 문을 열 때 들어가서 마감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그 넓은 곳을 종횡무진 누비며 하얗게 불태웠다.


뽀로로와 친구들의 공연을 보며 손이 부르트도록 박수를 치고, 크롱 언니를 만났다며 뛸 듯이 기뻐하던 아이들의 모습은,


어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아이들에게 가장 확실한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그날의 기억은 여행이 끝난 지금까지도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최고의 무용담이자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들 중 하나.
마침 제주에 머무는 동안 우리 부부의 결혼 5주년 기념일이 찾아왔다.


긴 하루를 보내고 곤히 잠든 아이들 몰래,

나는 서프라이즈로 포장해 온 랍스터와 갖은 해산물, 그리고 작고 예쁜 케이크를 식탁 위에 올렸다. 밖에서는 은은한 파도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고요한 숙소 거실에서 아내와 나란히 앉아 술잔을 부딪치며 우리는 지난 5년을 돌아보았다.


​"우리, 앞으로도 지금처럼 예쁜 것만 보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이들 잘 키워보자. 고생했어."


​아내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그간의 고단함과 치열함이 눈 녹듯 녹아내리며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우리는 술잔을 내려놓고 마당으로 나가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의 인공적인 불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별이 제주의 맑고 깊은 밤하늘에 쏟아질 듯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아내와 어깨를 맞대고 서서 별자리를 찾고 달빛에 조용히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소원으로 빌며, 나는 굳게 다짐했다.


세상 그 어떤 성공이나 화려한 타이틀보다, 언제나 내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곁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고.

​빽빽한 도심을 떠나 마주한 제주에서의 한 달은, 우리 가족에게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존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시간이었다.


시계를 잠시 멈추고 자연의 호흡에 발을 맞췄던 그 마법 같은 한 달 동안, 아이들은 스마트폰 영상이 아닌 아빠의 따뜻한 체온과 제주의 흙내음을 먹으며 눈부시게 자랐고,


치열했던 세상의 속도에 갇혀 있던 나는 비로소 내 진짜 자리를 찾은 '진짜 아빠'로 한 뼘 더 훌쩍 성장해 있었다.


제주도의 푸른 밤은, 나에게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쉼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