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죽음에 감동하고, 삶에는 무관심해지는가
어느 조용한 집, 혹은 이름 모를 병실 침대 위라고 치자. 창밖엔 여전히 차들이 지나가고 편의점 간판은 깜빡거린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며 생의 끝자락에 선 사람 말이다. 보라, 이내 암흑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렇게 한참 동안 빤히 끝난 삶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를 수 없는 결과를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서술자가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화면 밖의 당신을 똑바로 응시한다.
“어때? 지금 이걸 읽고 있는 너 말이야. 뭘 더 기대했어?”
“죽는 순간 영혼이 몸 위로 떠올라 삶을 관조하는 영화 같은 연출? 아니면 고집스럽게 지키려 했던 자존심이나, 목숨 걸고 증명하려 했던 신념들이 금가루가 되어 하늘로 흩어지는 장관이라도 펼쳐질 줄 알았어?”
“아니, 없어. 그런 건. 눈을 감는 순간 사랑했던 사람들도, 증명하려 했던 그 대단한 가치들도 한꺼번에 소멸해. 셧다운이라고.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실제 죽음은 이토록 허무하고 비릿한 물리적 종료일뿐인데, 왜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죽음에 화려한 의미를 덧칠하고 있는 걸까?”
“왜 어떤 죽음은 '순교‘가 되고, 어떤 죽음은 '충절’이 되며, 또 어떤 죽음은 '저항'이라는 근사한 이름표를 달게 되는 걸까? 그저 우리는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존재일 뿐인데, 왜 죽음이라는 순간까지 의미를 점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죽음 이후에 남겨질 무언가'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일 거야. 삶이 그저 허무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거지.”
“그래서 오늘 나는 그 포장지들을 하나씩 벗겨보려고 해. 문학이 죽음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각 시대와 작품들은 인물의 종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독자를 기만하거나 세뇌시켰는지 말이야.”
인간이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몇몇 사람들은 의미 찾기를 죽음의 순간까지 시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 찾기는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데, 죽음에 의미의 방점을 찍는 방식은 문학 작품마다 천차만별이다.
1. 공무도하가, 백수광부 아내의 노래.
임아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그예 물을 건너시네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가신 임을 어이할꼬
공무도하가는 고대가요로서 고조선 시기의 노래이다. 작자는 백수광부의 아내이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인 백수광부가 강을 향해 뛰어들려고 하자 이를 만류하였으나, 남편은 물에 뛰어들고 만다. 결국 물에 빠져 죽는 남편을 바라보며 그의 아내는 서글피 울며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들은 곽리자고라는 사람이 집에 돌아와서 자신의 아내 여옥에게 이 노래를 전한다. 그러자 여옥이 악기를 연주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는 배경설화가 전해진다. 백수광부의 아내가 부른 노래를 곽리자고가 듣고 다시 아내 여옥에 전달하였다. 이는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최초의 작품 개작, 노래의 리메이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임을 잃은 여인의 슬픔을 담은 노래라는 것은 분명한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대체 백수광부는 왜 갑자기 물에 뛰어든 것일까? 우선 백수광부라는 말은 백발의 머리를 한 미친 남자라는 뜻이다. 이름을 표면적으로만 살펴보면 정신착란 증상 때문에 물에 뛰어들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미친 사람이니 무슨 짓을 못할까?
그러나 고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했을 때, 이 백수광부의 정체를 달리 생각할 여지가 생긴다. 고조선 사회는 제정일치의 사회로 신앙과 정치(군사)가 하나의 권력자에게 집중되는 신화 시대였다. 지도자는 제사장을 겸임했으며 사람들의 신앙심은 다시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이 이성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서 무조건적인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당(제사장)을 불신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무당은 자신의 비범함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신성한 존재로서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무당이 이제는 백수광부로 지칭되며 미친 사람 취급받는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백수광부는 기적을 일으키고자 물을 향해 뛰어든다. 물을 가를 것인지, 위를 걸을 것인지, 물속에서 숨을 쉴 것인지 그 의도는 모른다. 백수광부의 실패를 의미하는 죽음과 함께 그 의도는 영원히 모르게 되었다.
이러한 작품의 해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백수광부에게 신성성의 상실은 죽음보다 두려웠다는 것이다. 백수광부에게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신성함을 잃는 것이며, 자신이 매개하는 신이 부정당하는 것이다. 즉 공무도하가에서 죽음은 생물학적 종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신화 시대의 종결이자, 더 이상 사람들이 맹목적인 신앙을 갖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어떤 삶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다.
2. Lord of the World, 로버트 휴벤슨
로버트 휴벤슨의 소설 세상의 주인은 1907년에 발표된 SF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100년 뒤의 미래를 가정하고 있는데, 1900년대에 상상했던 2000년대 초반의 모습은 다소 암울하다.
세계는 동방, 아메리카, 유럽으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펠센버그라는 초월적인 리더십을 가진 존재가 등장해 세계평화를 이룩한다. 펠센버그는 하나의 세계정부를 출범하고 종교 특히 가톨릭을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결국 이 탄압으로 인해 끝까지 신앙을 유지하던 가톨릭 종교인들은 폭격을 맞아 모두 사망하게 된다. 그 와중에도 종교인들은 마지막 미사를 진행하고 있고, 이들은 종교적 신념을 버리지 않아 죽음에 이르면서도, 종교적 신념에 따른 의식을 인생의 마지막 행위로 선택하고 있다.
작품의 말미는 매우 흥미롭다. 펠센버그와 반 그리스도교 일당들이 교황과 추기경들이 모여 있는 곳을 흔적도 없이 폭파시킨다. 세상에서 지워진 것은 기독교와 그들의 흔적이지만 소설에서는 그들의 찬양과 함께 세계는 끝을 맞이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신앙은 삶을 지키는 이유가 아니라,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명분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 선택을 비극이 아니라, 세계를 완성시키는 숭고한 결말처럼 그린다.
어떤 이들에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신앙이란 취미나 가치관의 일부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전부일 것이다.
예전 기독교인을 박해할 때, 기독교인을 가려내는 방법으로 예수의 그림을 밟고 지나가게 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는 일본 에도 막부 시대에 이루어진 후미에라는 방법으로 많은 기독교인이 이 한 번의 부정을 하지 못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이들에게 생명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다. 삶이란 가장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며, 연명을 위해 자신의 가치를 버려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는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일련의 두 작품에서 삶과 죽음에 부여하는 의미는 신앙과 같은 가치나 구도를 위한 과정으로서 기능한다. 가령 어떤 그림을 그리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가정해보자. 우리에게 종이와 일련의 도구들이 주어진다고 해서 그림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종이와 도구들이 없다면 그림을 완성시킬 수 없다.
어떤 이들에게 삶이란 궁극적 가치를 위한 필요 조건일 뿐, 그 자체가 충분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이렇듯 문학은 죽음을 숭고하게 정제하여 살아 있는 것보다 가치있는 죽음이라는 사고를 주입하기도 한다. 그러한 가치관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사상이 사회를 지배해서 삶의 영역이 좁아지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경계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의 행위를 비판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신앙은 삶보다 가벼운 신념이 아니라, 삶의 이유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국가를 위해 죽었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왜 숭고하다고 느끼는 걸까?
앞선 신앙 및 신성성의 증명을 위해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뜻 비슷한 말처럼 보이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신앙 및 신성성을 증명하기 위한 죽음은 개인이 삶보다 우선하는 가치관으로 종교를 선택한 것이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에 의해 삶이 경시되는 것은 국가가 탄생한 이유와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토마스 홉스는 자신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존재이며 자기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는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자연 상태는 욕구 충족이나 자기 보호를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계약으로 형성하게 된다. 이 결과물이 사회 계약의 산물인 국가이며, 사람들은 국가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평화와 안전을 보장받는다.
즉 국가는 개인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탄생한 개념이자 집단이다. 그런데 국가에 의해 개인의 삶 그것도 자기 목숨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위협받는다면, 그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1. 단심가, 정몽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는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킨 인물이다. 단심가가 나온 배경은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건국될 때 이방원의 회유(하여가)에 대한 답가로서 불린 노래이다.
노래의 해석은 간단하다. 이러저러한들 어떠하니 조선에서 잘 살아보자하는 이방원과 하여가의 유혹에 죽어도 싫어라고 대답하는 작품이다.
정몽주의 고려에 대한 충절은 조선에 대한 반대 의식으로도 이어졌다. 회유에 대해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건국에도 반대하며 강력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런 충절의 결과,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당한다.
정몽주는 어떤 평가를 받은 사람인가? 당대에 정몽주는 학자로서도, 관리로서도 인정을 받았던 인물이다. 현대의 우리들에게 정몽주가 얼마나 뛰어난 학자였고, 얼마나 뛰어난 공무원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기억하며 고려와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충신으로만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으로서의 그는 사료에는 저장되어 있을지언정 우리에게는 국가라는 체제에 순응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인물로 기억될 뿐이다.
정몽주의 삶은 어떠한가? 정몽주는 하나의 왕을 섬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몽주는 생전에 위화도 회군에도 찬성하며 우왕을 폐위시키는데 일조하였다. 또한 다음으로 창왕을 폐위 시키고 공양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러한 행적 탓에 정몽주는 왕에 대한 충절이 아닌 고려라는 나라에 충절을 다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그의 모든 행동은 고려라는 나라의 번영이란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심가에서 나타나는 임의 정체는 개인이 아닌 고려라는 국가가 되는 것이며, 정몽주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이다.
작품의 내용, 창작 맥락, 작가의 삶을 보았을 때까지는 꽤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사후에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논하면 그 모습은 다소 달라보인다.
국가를 위해서 지조를 지키며 죽음에 이른다. 정확한 실체도 없는 체제의 유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는 그의 행적 탓에 그토록 반대했던 조선왕조에서도 충절의 상징으로서 오래도록 다루어지며 국가에 충성하도록 교육하는 소재로 사용된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 한국 심지어는 북한의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몽주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이것인가? 문학과 기록,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은 삶과 죽음을 어떻게 체제 유지를 위한 선전으로 활용하는가?
충신 정몽주는 오늘도 죽지 못한다.
2. 경기병 여단의 진격, 알프레드 테니슨
"진격, 경기병 여단!"
어느 누구라도 두려워했던가?
아니 그 누구도, 비록 병사들은 알았지만,
누군가가 실수했다는 것을.
그들은 되묻지 않으며,
그들은 이유를 따지지 않았네.
그들은 명령을 따르고 죽을 뿐이니.
죽음의 계곡으로
육백 명의 기병은 달렸네.
포탄이 오른쪽에,
포탄이 왼쪽에,
포탄이 그들 앞에,
날아오고 터졌네.
총알과 포탄의 폭풍 속으로
용감하게 그들은 돌진하였네,
죽음의 턱 밑으로,
지옥의 아가리 속으로
육백 명의 기병은 달렸네.
위 작품은 크림전쟁 당시 발라클라바 전투 때 영국군이 상부의 무리한 전투 명령을 받고 대참패를 당한 것을 배경을 한다. 그들은 러시아의 포격에 의해 큰 피해를 받을 것도 알고, 상부가 합리적 명령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합리성이나 생의 의지가 아니었다.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의 명령에 충성하며 용감하게 진격하였고, 약 660명 중 1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영국 지휘부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전투는 종군 기자의 취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 기사를 읽은 알프레드 테니슨은 해당 시를 발표하게 된다. 이 시의 내용은 지휘부의 어리석음과 무참히 사라져야 했던 생명에 대한 애도를 다루지 않는다. 그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미화해서 다룰 뿐이다.
물론 전시 상황에서 아군과 국민들을 고양시키기 위한 문학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참패했을 경우에는 그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문학과 문화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도 어찌보면 자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경계해야 할 것은 어떤 가치가 생명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위한 사회계약의 산물이다. 이러한 산물이 오히려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때 국가는 존재 가치를 잃는다.
작품은 말미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그들의 영광이 어찌 잊히랴?
아, 경기병의 그 용맹한 진격을!
온 세상이 놀라워 전율하였던.
그들의 진격을 영예롭게 하라!
그들 경기병을 영예롭게 하라,
고결한 육백 명의 기병이여!
세상이 전율하든, 그들의 진격이 영예롭든, 어떤 시인의 펜대가 그들을 고결하다고 지껄이든 간에 그들의 목숨은 무참히 져버렸다. 무를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다시하기가 허락되는 것은 게임이나 동화 속 얘기일 뿐, 우리의 삶은 무심히도 흘러갈 뿐이다.
이념이 후려친 자리에서 무참히 져간 생명에 애도를 표한다.
[작가의 말]
이 글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단순하게 죽음만을 말하기 위해 쓴 글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삶보다 어떤 가치에 감동하도록 길들여져 왔는지를 묻고 싶었습니다.
문학은 때로 인간의 가장 고귀한 순간을 기록하지만, 동시에 삶을 설득하는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이번 강독 노트에서는 작품 속 인물들이 죽음을 통해 어떤 의미를 획득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했습니다.
신앙, 국가, 개인적 가치, 그리고 연명 그 자체까지 네 갈래로 구성해 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글이 길어져 이번 편에서는 국가 파트까지만 담았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남은 논의를 이어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이 글이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의 삶과 가치에 대해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읽으며 떠오른 생각이나, 동의되지 않는 지점, 혹은 다른 해석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완결된 답이 아니라, 함께 이어가고 싶은 질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