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강독 노트 vol.2-2, 사느냐 죽느냐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면 살아 있을 것인가?

by 사유하는 인문학도

1. 살아 있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아무런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 상태를 가정해보자. 아마존의 밀림 혹은 아프리카 초원 말이다. 뱀은 아가리를 있는 힘껏 벌리고 카멜레온은 몸을 숨긴다. 굶주린 사자는 필사적으로 영양을 쫓고, 위협을 느낀 가젤은 심장이 터져라 도망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절대적인 명령어가 입력된 칩을 이식받는다. 살아남으라는 명령. 이 절대적 명령 앞에서 도덕이나 철학은 사치에 불과하다. 배를 채우기 위해 사냥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짝을 짓는 것. 그것이 수억 년간 이어져 온 자연의 경이로운 질서였다. 그런데 이 견고한 자연계의 법칙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주 기이한 행동을 하는 종이 딱 하나 있다.


인간의 역사에는 생존 본능이라는 강력한 소프트웨어에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를 일으킨 기록들이 가득하다. 어떤 이는 스스로의 생명에 위해가 되는 행위를 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생명을 끊기도 한다. 굶주림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도 눈 앞의 음식을 보며 고개를 돌린다. 또 어떤 이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치를 잃자, 스스로 자신의 심장 박동을 멈추는 쪽을 택했다.


포식자에게 먹히는 것도 아니고,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단지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행위. 이것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결함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막힌 변기를 잡고 서럽게 울어본 적 있는 우리는 안다. 괴로움을 잊으려 스스로의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서럽게 울어본 적 있는 우리는 안다. 이 서늘하고도 뜨거운 오류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 원하는 것이 박탈당한 삶은 죽음보다 괴롭다는 것을.


그렇게 목숨보다 소중한 관념을 품는 순간, 인간은 자연의 설계도를 찢고 나와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된다. 보라, 그 치명적인 오류를 기꺼이 선택한 인간을 조명한 문학이 있다. 폭력적인 세상 속에서 이제 우리는 생존 본능을 이겨버린 그들의 고결하고도 비극적인 고집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2. 너를 상처 줄 수 없어서 나를 상처 입히는 것

인도에서 발원한 종교 중에서는 자이나교라는 것이 있다. 자이나교의 주요 교리는 아힘사로 불살생이다. 이는 매우 강력한 규율로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이나교의 교리에 따르면 농작물을 해치는 해충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자이나교의 수행자는 길을 걸을 때도 빗자루를 쓸며 걸으며 아주 작은 벌레도 밟지 않아야 한다. 이들은 식물조차도 생명이 있다고 믿으며 그 생명의 근원인 뿌리는 먹지 않고 열매나 잎만을 먹는다. 게다가 세상은 아주 작은 미생물인 니고다로 이루어져 있기에 바람이나 물과 같은 물체도 상처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은 숨을 많이 쉬지 않기 위해 격한 활동도 피하며 수분도 최소한으로 섭취한다. 이들의 궁극적 목적은 고요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삼매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극한의 이타성과 배려심에 기반한 이 행위에 조금 의아함이 생긴다. 모든 생명이 소중해서 상처주지 말아야 한다면, 나는 나에게 상처를 주어도 되는가?


1. 한강, 채식주의자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주인공 영혜가 꿈을 꾼 뒤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임을 선언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이는 단순히 식성의 변화에서 국한되는 게 아니라 영혜의 이상 행동 및 건강 악화로 이어진다. 작품에서 영혜의 이러한 행동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평가 받으며 가족들은 억지로 영혜에게 고기를 먹이려 한다. 그렇게 억지로 입에 고기가 쑤셔 넣어진 영혜는 즉시 자해를 시도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친 영혜는 형부와 육체적 결합을 맺는 등 기괴한 일탈 행동을 이어나간다. 설령 형부가 먼저 제안했다고 한들 말이다. 터부시 되는 행위를 모두 행하는 영혜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입원한 후에도 본인을 나무라고 믿으며 광합성을 시도한다.


영혜는 결국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이야기는 마무리를 맺는다.


대체 영혜는 왜 이런 기행을 벌인 것일까?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론에 근거하여 채식주의자를 읽어나가지만, 결국 영혜의 기행은 영혜의 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 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영혜는 그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으려 한다. 날이 섰다면 그 무엇도 영혜는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영혜는 자신의 둥근 젖가슴을 좋아한다. 모난 곳 없이 누구도 상처주지 못하는 자신의 가슴만을 믿는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


이러한 가슴 예찬(?)은 채식주의자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에서도 모든 공격적인 쇠붙이와 의미 없는 껍데기는 가고, 아무 것도 해칠 수 없는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으라고 말을 하며 시상을 종결하고 있다.


이렇듯 아무 것도 해칠 수 없는 가슴만을 믿는 영혜는 그 무엇도 해치지 않기 위해 극한의 불살생을 실천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생활의 결과 점차 몸이 말라가고, 마른 몸은 누군가를 찌를 듯이 날카로워진다.


채식주의자에 대한 몇몇 감상을 보면, 정상성을 강요하는 공동체주의의 폭력에 저항하고 있다는 해석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해석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채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채식이 기본적으로 식습관 이상으로 비폭력이라는 윤리적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 보니, 채식주의자의 존재는 육식을 하는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 드는 불순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영혜의 건강이 걱정된 가족들의 애정도 존재하겠지만, 먹지 않겠다는 사람을 향해 억지로 입에 넣는 것은 공동체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 자를 억지로 교화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영혜에게는 어쩌면 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어서 먹어. 채식? 네가 도덕적으로 그렇게 우월해? 모두를 불편하게 하지마. 순응해. 빨리 입에 고기를 넣어. 너도 우리와 같아.”


이런 순응을 강요하는 폭력의 문제를 고발하는 것. 이렇게 해석한다면 아직 해소되지 않는 지점이 보인다. 영혜가 채식으로 인해 점점 매말라가는 자신의 몸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 같은 구절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앞선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은 위와 같다. 영혜는 아무 것도 해칠 수 없던 것 같던 자신의 몸을 보며 생각한다. 아무도 해치지 않음을 통해 누군가를 해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역설을 생각한다.


코끼리도 풀만 먹는데, 많이 먹으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영혜의 몸은 매말라가며 타자를 찌를듯이 뾰족해보인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소설 속 영혜의 행적을 보면 타인에 대한 폭력을 행하지 않아 이러한 해석에도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영혜가 그렇게 원하는 불살생을 실천함에도 왜 영혜는 만족하지 못하는가? 앞선 자이나교의 교리를 설명하며 마지막에 언급한 것처럼,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는 윤리적 선언은 왜 자기 자신에게는 향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영혜는 스스로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가?” 영혜의 날카로운 몸이 질문하자, 영혜는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불안함을 느낀다.


생명에 대한 존중으로 시작된 채식을 통해 영혜는 본인의 생명을 존중하지 못하는 모순을 생성한다. 이러한 모습에서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실천하는 채식 문화의 본질이 흐려지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분명 윤리적 의식에서 시작한 채식 문화가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구에 의해 결국 갈등을 재생산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꼭 국가나 종교에 의한 공동체적 요소가 아니더라도, 개인적 가치관과 신념은 삶보다도 소중해지는 것이 종종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신념의 수호가 결국 타자 혹은 자기 자신을 해하려 한다면, 그 때도 그 신념은 존중받아야 하는가?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3. 그래도 삶이 계속 되잖아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나치당은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1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하는 만행을 벌였고 이를 홀로코스트라고 부른다.


이러한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는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는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 폭력이 자행되었다. 이런 만행을 고발한 문학을 홀로코스트 문학이라고 하는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리고 엘리 위젤의 ‘Night'가 대표적인데 그 중 ‘Night'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앙심 깊은 유대인 소년이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 가게 된다. 도착 직후 가족들은 가스실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며 소년은 남은 가족과 매일 같이 고문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인간이 인간 이하로 격하되었을 때도 유대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에게 기도했고, 이 위기를 이겨낼 힘을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서도 율법을 지켰고 속죄일에는 단식을 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나 소년은 단식을 하지 않았다. 소년에게 신은 존재한다고 한들 이 수라도에서 침묵하는 존재였고, 그에 대한 반항으로서 소년은 음식을 먹는다.


이러한 상환 속에서 어떤 인간이 고고할 수 있을까? 수용소 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빵을 훔치거나 가족끼리 서로 버리는 광경이 펼쳐진다. 인간으로서 응당 지켜야 할 가치는 살고 싶다는 목소리 위에서 공허할 뿐이다.


소년은 끝끝내 목숨을 이어나가며 살아남게 되었고, 생존을 위해 인간적 가치가 버려지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도 신앙을 부정해가면서 살아남은 소년의 모습은 공허할 뿐이었다.


안니 발레 카라치, 콩을 먹는 남자

영혜는 먹지 않음으로써 공동체의 폭력에 저항하고, 삶보다 중요한 가치관을 주장했다. 이와 대비되게 소년은 먹음으로써 신의 방관에 저항하였고, 삶과 그것을 이어나가는 것을 지향하였다.


결과적으로 소년은 삶보다 중요한 가치관은 없었다. 어떤 가치도 삶이 있어야 존속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비인간적인 대우도 소년의 생명을 끊어놓지 못했다.


소년이 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가?

아버지의 빵을 빼앗은 사람이 패륜아라는 생각이 드는가?


뭐 마음대로 이야기 할 수 있겠다.

결국 그 생각과 주장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이번 문학 강독 노트 시리즈는 두 편으로 나눠서 진행해보았다. 문학 작품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조명해보고자 하였다.


선별한 작품을 통해 인간은 신앙, 국가, 신념을 위해 죽을 수도 있으며 혹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연명하기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음을 확인하였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과 삶이라는 생존의 문제가 대치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무엇을 고를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이 고른 것을 스스로에게 충분히 설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숙고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선택은 가벼울 수 있지만,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 글을 읽은 뒤 이런 생각을 해보아도 좋겠다.


1. 삶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는가? 혹은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 삶과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대립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무를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2. ‘1’에서 본인이 한 선택에 영향을 미친 요인은 무엇인가?

- 삶 혹은 어떤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그 생각은 정말 본인의 생각인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는가?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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