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강독 노트 vol.3, 저질? 나한텐 이게 일류야

우리는 언제부터 재미를 변명하게 되었을까?

1. 양산형 판타지 소설

[S급 헌터인 내가 소설 속 공작가의 시한부 막내아들?!]

제미나이 생성 이미지, 양산형 판타지 소설의 표지

1. 비참한 죽음과 빙의

현대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였던 주인공은 믿었던 동료들에게 배신당해 던전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눈을 뜨니 낯선 화려한 침대 위. 거울 속에는 자신이 읽다 하차한 막장 피폐 소설 속, 악당 공작가의 무능하고 병약한 막내아들 카시안의 모습이 보입니다.


카시안은 곧 처형당할 운명인 '가짜 공작가 아들'로 빙의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때,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납니다.


2. 시스템의 등장

[시스템: '원작 파괴자'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Y/N)]

전생의 헌터 능력과 회귀 전 읽었던 소설의 설정을 이용해, 그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을 세웁니다.


원작의 주인공이 가져갈 보물과 기연들을 미리 알기를 통해 싹쓸이합니다. 병약했던 몸은 전설적인 영약을 먹고 만독불침과 마력 회로를 갖추게 됩니다. 차갑기만 했던 공작 아버지와 무심했던 형들은, 예전과 달리 냉철하고 유능해진 카시안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을 열며 강박적인 동생 바보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뭐 그리고 잠깐 꼬이고 더 센 악당이 나타나는데, 근데 카시안 짱짱이라 다 이김. 아무튼 다 이김 ㅋㅋ


저질이라는 말, 솔직히 이해는 한다. 문장도 거칠고, 설정은 과하고, 전개는 노골적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이걸 읽다가 멈추질 못했다.


의미를 찾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교훈을 기대한 것도 아니다. 그냥 다음 화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의 독자에게 충분한 이유다.


웹소설을 두고 저질 양산형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웹소설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다. 사실 돌 던지는 사람들도 읽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이게 정말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가 재미를 부끄러워하는 게 문제일까?


왜 문학은 고고해야 하는가? 언제부터 우리는 독서라는 취미에서도 체면을 차리게 되었는가?


2. 소설의 가치 판단 기준

솔로몬의 판결

좋은 소설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아니 우선 소설을 판단해서 줄을 세우는 것이 가능한가?


예술은 스포츠가 아니다. 이 말은 예술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이며 그 안에서 대중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반대로 대중적 공감 및 판단으로 우열을 매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예술은 줄을 세우거나 등수를 매기려는 작업은 아니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그 시대의 모든 책 중에 가장 우월한 것은 아니며, 노벨상 수상작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이상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척 보면 어떤 작품이 좋고 싫은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아무리 인상 평가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기준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을, 특히 문학 작품인 소설을 어떠한 기준에서 평가하고 있는가?


1. 교훈성

문학 작품의 우수성을 판단하는 많은 기준 중 하나는 그 작품이 우리의 삶에 어떤 교훈을 주느냐이다. 어떤 책은 우리에게 배움과 깨달음을 주며, 무언가를 알려주거나 삶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이런 기준 하에서 우수한 문학이란 바른 가치관을 담고 있으면서 그 가치관을 독자에게 주입시키거나 혹은 독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읽은 많은 책들에도 교훈이 있는 경우가 많다.

나무꾼과 헤르메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는 원래 그리스에서 기원한 것을 한국적으로 바꾼 내용이다. 우리가 아는 금도끼, 은도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착하고 성실한 나무꾼이 나무를 베다가 실수로 도끼를 연못에 빠뜨린다.
연못에서 엉엉 우는 나무꾼에게 산신령이 나타나 금도끼와 은도끼를 차례로 보여주며 이게 네 것이냐고 묻는다.
정직한 나무꾼은 자기의 도끼는 쇠도끼라고 대답한다.
정직함의 보답으로 모든 도끼를 나무꾼이 얻게 되고 나무꾼은 부자가 된다.


이 이야기는 산신령이라는 환상적인 요소, 고난과 해결이라는 측면에서의 재미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의 주제가 뭐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정직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가 흔하게 접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에는 이처럼 교훈이 담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한 번 머리속으로 아무 이야기나 떠올려 보라. 그 이야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분명 어떤 교훈이 숨쉬고 있지 않은가?


이야기들이 그 속에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을 때,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얼마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지, 삶에 얼만큼 유용한지는 좋은 문학 작품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2. 예술성

천지창조, 미켈란젤로

문학의 예술성은 문학이 단순한 정보 전달이나 사실 기록을 넘어, 언어를 통해 인간의 경험과 세계를 미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에서 논의가 시작된다. 문학은 무엇을 말하느냐뿐 아니라 얼마나 아름답게 말하느냐를 통해 독자에게 감동과 사유를 동시에 제공한다. 문학을 통해 독자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정서적으로 한 차원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조금 위험한 표현일 수 있지만, 예술성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문학을 점점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어버린 가장 큰 주범이기도 하다. 책의 매력에 이미 매료되어 더욱 섬세한 표현과 결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예술적인 문체와 기법에 더욱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책의 매력에 그렇게까지 심취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오묘한 차이는 의미 없는 디테일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게 세부적인 디테일에 집착하게 되고 대중들에게는 외면 받는다.


하지만, 대충 비슷해보이던 것들에서 작은 차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된 사람들에게 조금씩 위를 추구하는 과정은 꽤나 즐겁다. 그리고 일반 대중의 시선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 똑같은 작업을 수십 수천 번을 반복한 사람들에게 비전문가보다 차이가 더욱 확연히 느껴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벨루가 (안성재 셰프님을 의도하였으나, 초상권을 존중하여 비슷한 사진으로 갈음)

가령 흑백요리사에서 안성재 셰프님과 백종원 대표님이 음식을 먹고 심사를 한다고 해보자. 나폴리 맛피아님의 리조또를 먹으며 알덴테(씹었을 때 단단함이 느껴질 정도로 설익은 상태)의 익힘임을 언급하며 "일반 대중이 이 맛을 보고 맛있다라고 느낄 수 있을까요?"라고 의문을 가지는 장면이 나온다.


혹자는 이 심사 장면을 보고 음식 맛이 거기서 거기지하면서 그들의 심사평을 오버스럽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을 요리라는 한 분야에 바치고 진지하게 임한 사람들의 전문성을 믿을 때 우리는 그 심사평을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아, 나도 저 음식 먹어보고 싶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흑백요리사에 출현한 셰프들의 식당을 앞다투어 예약하고, 그들의 식당을 예약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그렇게 우리는 전문가가 높게 평가한 요리를 경험하기 위해 오늘도 치열하게 예약을 시도한다.


문학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대중들은 어쩌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문체와 예술적인 디테일을 문학 비평가와 전공자는 포착해내고 이내 감동한다. 그리고 그들이 해석하고 느낀 바를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게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표현한다. 일종의 심사평이자 감상평이다.


유독 문학 비평, 예술 비평을 허세로 치부하고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와, 이거 진짜 맛있다! 너도 먹어!”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추천하는 것이다. 오버스러운 표현이 있다고 한들 너무 나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3. 흥미성

독서중인 클로드 모네

소설이 가진 흥미성이란 말 그대로 독자를 이야기 속에 몰입시키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흥미진진하게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힘이다. 대체로 갓 문학에 입문하게 되는 시기에 가장 강력한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고는 한다.


떠올릴 수 있다면 떠올리고, 아니면 논리적으로 가정해보자. 당신이 살면서 가장 처음으로 스스로 읽은 책은 무엇인가? 당신은 왜 그 책을 읽었는가?


루크레티우스 (기원전 로마의 시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년 시절 접한 재미있고 환상적인 동화책을 떠올릴 것이다. 흥미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게 한 첫 계기이자 많은 독자들이 독서를 이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기원전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도 '당의설'을 주장하며 문학은 쓴 약(교훈)에 달콤한 설탕 옷(재미)을 입혀 전달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일종의 문학 탕후루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탕후루


이렇듯 기원전부터 문학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사람들에게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흥미, 재미라는 설탕 옷으로 감싸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문학의 우열을 가리고 웹소설을 저질의 것으로 치부하는가?


우리 조금 솔직해져 보자. 인간이 원초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울고 싶으면 울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게 당연한 인간의 욕구 아닌가? 그러한 인간의 욕구에는 당연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거나 읽고 싶다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어디든지 수요가 몰리면 공급이 생기고, 공급하는 물품은 수요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즉 웹소설의 성장은 사람들의 수요에 의한 것이며 웹소설의 주요 트렌드인 전생, 회귀, 빙의는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인 것이다.


3. 왜 전생, 회귀, 빙의인가?

전회빙으로 일컬어지는 전생, 회귀, 빙의가 웹소설 시장에서 범람하는 이유는 앞선 논의에 따르면 많은 독자들이 읽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세 요소를 욕망하는가?


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 요소는 공통적으로 한 번 실패를 경험한 주인공이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생과 회귀의 경우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을 과거의 미숙했던 자신과 달리 예견하고 있는 상태에서 능숙하게 해결하여 쾌감을 얻게 된다.


빙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비범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원숙한 상태로 미숙한 몸에 빙의하여 본디 해결하지 못할 과업을 능숙하게 해결하여 쾌감을 얻는다.


그러면 공통적으로 이러한 웹소설이 범람하는 것은 인간이 미숙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무지한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무력함을 기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들 그런 생각은 한 번쯤 해보지 않았는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 생각의 저변에는 그 시절이 그리워서라기보다 그 시절을 더욱 현명하게 헤쳐나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발현된 것이다.


그런 가려움을 완벽하게 긁어주는 장치가 전회빙인 것이며 이러한 장치가 쓰인 소설을 읽고 인간은 즐거움을 얻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설이 양산형이고 예술성이 없다고 해서 비판 받아야 하는가? 아니 어쩌면 지금 사회에서 느끼는 무력감에서 사람들에게 숨 쉴 틈을 주는 휴게 공간은 아닌가?


예술성 있고 교훈성 있는 문학을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하고 깎아내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면, 반대로 재미있는 문학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하급의 독자로 폄하하는 것도 그리 온당치는 않다. 재미는 어느 가치에도 뒤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허세를 걷어내자, 사실 재미있지 않은가?

아니라고? 나는 좀 다르다고? 뭐 그렇게 믿고 싶은 것도 이해 못할 건 아니다만.


이런 생각을 더 해도 좋을 것이다.


1. 내가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한 것이 과연 그렇게 여겨져도 되는 것인가?


2. 그 대상을 즐기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은 무엇인가?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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