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루게릭이라는 병

병명보다 더 무거웠던 '완치 불가'라는 말

by Journey

진료실에는 늘 비슷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손때 묻은 차트 파일, 의사의 손목을 받치는 마우스 패드, 벽에 붙은 해부도, 그리고 습관처럼 굴러가는 볼펜. 그 펜 끝이 어디를 가리킬 때마다 우리 집의 시간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원치 않는 방향으로.


처음은 허리였다.

아버지는 "허리가 좀 뻐근하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우리 집에서 너무 흔한 말이었다. 나도, 엄마도, 누구나 한 번쯤 허리를 잡고 앓는 소리를 했으니까. 아버지도 그냥 그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원래 아픈 티를 잘 안 내는 사람이었다.

몸이 불편해도 먼저 말하는 법이 없었다. 밥 먹다 숟가락 놓고 "다 먹었어" 하고 일어나면 그게 끝이었다. 속이 안 좋아도, 피곤해도, 그냥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그러니까 "허리가 뻐근하다"는 그 말이 우리한테는 별 신호가 아니었다. 말할 정도면 꽤 오래된 거겠지, 정도로만 넘겼다.


정형외과를 다녔고, 신경외과를 다녔다. 엑스레이를 찍고, MRI를 찍고, "디스크가 조금 눌렸네요" 같은 말을 들었다. 주사 맞고 물리치료받고, 허리 보호대를 차고, 파스를 붙였다. 병원에서 나올 때마다 아버지는 대충 웃으며 말했다.


"다들 그렇대. 나이 들면 허리는 다 그래."


그때는 정말 디스크인 줄만 알았다. 병이라는 게 보통은 그렇게 시작하니까. 평범하게. 흔하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순간들이 늘었다. 허리 통증이 줄어들기도 했는데, 몸은 오히려 더 안 되는 쪽으로 갔다. 허리의 힘이 빠지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지탱을 못 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상체를 일으키는데, 팔로 짚고 일어나질 못하는 날이 있었다. 단지 아픈 게 아니라, 몸이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것 같았다.


마트에 가던 날도 기억난다.

아버지가 운전대를 잡고 나가려다가 결국 멈췄다.


"오늘은 네가 해."


처음엔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오늘"이 자꾸 늘었다. 생활의 많은 것들이 아버지 손에서 조금씩 빠져나갔다. 주차, 장보기, 무거운 거 드는 일. 원래 그런 걸 제일 먼저 나서서 하던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그 빠져나가는 속도를 눈치로만 따라갔다.


그즈음부터 병원도 달라졌다.

정형외과와 신경외과만 다니던 사람이 내과를 가고, 신경과를 가고, 검사실을 전전하게 됐다. 그러다 '중증근무력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상하게도 병명은 붙는 순간 조금 덜 무섭다. 적어도 길이 있는 것 같으니까. 약이 있고, 치료가 있고, "좋아질 수도"라는 말이 따라붙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병으로 꽤 오래동안 1년이 넘게 치료를 했다.

큰 병원을 돌아다니고, 유명하다는 데를 찾아가고, 검사하고, 약을 바꾸고, 경과를 봤다. 좋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나빠지고, "좀 더 지켜봅시다"라는 말이 달력 위에 계속 찍혔다. 그 시간은 길었고 애매했다. 희망이 있다는 건 좋은데, 그 희망이 자꾸 미끄러지면 마음이 닳는다. 그때 아버지는 말이 더 줄었고, 웃음이 잘 안 나왔다. 원래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때부터는 밥상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날이 손에 꼽혔다.


그리고 호흡이 조금씩 힘들어졌다. 처음에는 "숨이 좀 가쁘다" 정도였다. 계단을 오를 때, 말을 길게 할 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숨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졌고, 어깨가 자꾸 올라갔다. 숨이 '가슴'이 아니라 '몸 전체'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증근무력증으로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갔다.

빨리 치료해서 완치를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러나....

그 의사는 차트를 오래 보고, 검사 결과를 오래 보고, 우리를 한 번 보고, 다시 차트를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근무력증...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차갑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길을 잃었다는 말처럼 들려서였을까.


"다른 걸 의심해야 할 것 같아요. 다른 병원에서 추가 검사 필요합니다."


그 뒤로 다시 '돌아다니는 시간'이 시작됐다.

병원을 옮겨 다니고, 진료를 잡고, 검사실을 오가고, 또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 몸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몸은 스스로 속도를 내고 있었다. 우리는 발맞춰 뛰는데도 자꾸 늦었다.


결국 호흡 곤란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그날은 늘 그렇듯이 갑자기 찾아왔다.

아버지가 숨을 쉬는데, 숨이 아버지 마음대로 안 됐다. 말이 끊기고, 표정이 달라지고, 어머니 손이 떨렸다. 구급대원 발소리, 들것의 바퀴 소리, 응급실의 밝은 형광등. 그 밝음이 사람을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아버지는 기도 삽관을 했다.

말은 차분했다. 의사도, 간호사도 “지금은 이게 필요합니다”라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공기는 차분하지 않았다. 기계음이 먼저 커졌고, 손이 먼저 빨라졌다.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말이 평소보다 더 빨리, 더 차갑게 들렸다.


삽관은 ‘처치’라기보다 경계선 같았다. 그 선을 넘고 나서부터는 숨이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다. 누가 지켜보고, 누가 맞추고, 누가 관리해야 하는 일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루관을 달 수밖에 없었다.
먹는 일이 위험해지면, 밥은 더 이상 ‘밥’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 날부터 식사 대신 ‘주입’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숟가락을 놓고, 시간표를 들었다. 밥상에서 나던 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약통 뚜껑 여는 소리와 유동식 박스 뜯는 소리가 늘었다. 그게 우리 일상에서 가장 조용하게 무너진 부분이었다.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시간이 늘어났다.

결국 우리는 더 큰 병원으로 옮겼다. “여기서도 아니면...” 같은 마음으로.

거기서 여러 검사를 통해 중증근무력증이 아닌 루게릭병 확진을 받았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ALS, 루게릭병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문장.


"현재로서는 완치는 어렵습니다."


나는 그날 병명보다 그다음 문장을 더 오래 들었다.

'루게릭'은 처음 들어도 어딘가 들어본 것 같았다.

야구선수 이름, 어디선가 본 다큐멘터리.

근데 '완치는 어렵습니다'는 처음 들어도 바로 알아들었다. 낫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도착지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


진료실을 나오면서 아버지 얼굴을 봤다. 표정이 없었다. 놀란 것도,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없었다. 원래 감정을 얼굴에 잘 안 드러내는 사람이었는데, 그 순간의 무표정은 달랐다. 아버지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때부터 아버지는 와상 환자로 3년을 넘게 살았다.

와상이라는 단어는 너무 깔끔하다. '누워 있다'는 뜻이지만, 실제는 '누워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누워서 쉬는 게 아니라, 누워서 버티는 것. 그리고 그 버티는 삶은 평평하지 않았다. 응급상황이 끊임없이 솟구쳤다.


응급상황은 늘 예고 없이 왔다.

가래가 끓는 소리, 숨의 리듬이 바뀌는 소리, 기계에서 나는 경고음.

어머니는 그 소리를 기계보다 먼저 들었다. 깊게 잠드는 날이 거의 없었다. 쪽잠과 선잠 사이에서 살았다.


어느 밤, 산소포화도가 급락했다.

그날이 몇 월 며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날짜를 기억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밤이었다. 집은 어둡고, 기계 소리만 있었다. 늘 그렇듯이.


어머니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


여보...?"


부르는 소리가 작았는데, 그다음 숨소리가 빨라졌다.


안방으로 뛰어갔을 때 아버지 얼굴빛이 평소와 달랐다. 기계 알람이 울리기 전인데도 알 수 있었다. 산소포화도 숫자가 내려가고 있었다. 90대에서 80대로,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떨어졌다.


그 순간부터 사람의 눈은 숫자에 붙는다.

숨을 봐야 하는데 몸이 먼저 숫자를 본다.

어머니는 튜브를 확인하고, 연결을 확인하고, 아버지 고개를 조금 돌려주고, 이불을 걷어냈다. 손이 바빠질수록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왜 이러지... 왜 이러지..."


석션을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하던 건데, 그날은 손이 다르게 움직였다. 급해지면 손이 급해지고, 급해질수록 실수가 날까 봐 더 무서워진다. 어머니는 "천천히, 천천히..."라고 말하면서도 눈은 모니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치가 잠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그게 제일 무서웠다. 살아나는 척했다가 다시 꺼지는 것. 안도감이 올라오기도 전에 바닥이 꺼지는 느낌.


어머니가 119를 눌렀다.

그 동작엔 망설임이 없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겪었으니까.


"산소포화도가... 갑자기 떨어져요."


어머니 목소리는 차분한 척했지만, 단어 사이가 떨렸다.


구급대가 오기까지의 시간은 늘 길게 느껴졌다.

현관문이 열리고, 구급대원이 들어오고, 산소통이 놓이고, 장비가 열리는 소리. 짧은 질문들이 오갔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기도삽관, 위루관... 맞으시죠?"


우리는 대답을 하면서도 설명이 길어질까 봐 겁났다. 설명하는 동안 숫자가 더 떨어질까 봐.


아버지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잠옷 위에 겉옷만 걸치고 따라나서며, 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계속 방금 본 숫자를 떠올렸다.

70대 아래로 떨어지던 그 순간의 공기.

응급실은 너무 밝았다.

밝아서 더 잔인했다.

사람의 무너짐을 환하게 비추는 느낌.


그렇게 병원을 오가는 일이 반복됐다.

검사나 시술이 필요하면 응급 앰뷸런스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대리처방으로 해결되는 날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무서웠다. 그럴 때마다 '이제 또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2~3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대리처방을 받고 약을 타왔다.

약은 그냥 먹이는 게 아니었다. 갈아야 했다. 물에 섞고, 위루관으로 천천히 넣고, 그다음엔 식염수로 관을 씻어야 했다. 한 번 하고 끝이 아니라 시간표대로 반복됐다. 하루는 약 시간으로 쪼개졌다.


유동식은 몇 박스씩 들여왔다.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질까 봐 늘 여분을 쌓아뒀다. 식염수와 멸균 증류수도 항상 있어야 했다.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었는데, 그 "항상"이 사람을 갉아먹었다. 항상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 항상 부족할까 봐 불안해하는 마음.


석션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가래 끓는 소리가 나면 어머니는 일어났다. 위생장갑을 끼고, 카테터를 꺼내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한 번 하고 끝이 아니라 또 해야했다. 눕히고 돌아서면 또 소리가 난다.


어느 새벽이었다.

아버지 석션을 마치고 어머니가 장갑을 벗는데, 손이 멈췄다.

그냥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등이 보였다. 작아 보였다.

그게 전부였는데, 나는 그 뒷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뭔가를 말하려다 그냥 조용히 방을 나왔다. 말을 걸면 어머니가 무너질까 봐서가 아니라,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집은 조금씩 병실이 됐다.

침대 옆에는 기계와 소모품이 쌓였다. 물건들의 위치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가 닿을 수 있는 거리, 어머니가 바로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거리. 그 거리 안으로 집안의 생활이 몰려들었다. 거실도, 부엌도, 화장실도 병의 동선에 맞춰 바뀌었다.


그리고 그 모든 한가운데에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기도삽관으로 인해 말을 하지 못했지만 눈과 표정이 말을 했다. 무엇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눈으로 너무 많이 했다. 늙은 아내가 밤마다 일어나 기계를 만지는 모습, 다 큰 자식들이 주말을 반납하고 뛰어오는 모습, 그걸 누워서만 봐야 하는 무력함. 아버지는 병보다 그 무력함을 더 견디기 힘들어했다.


나는 그게 제일 마음이 아팠다.

병이 무서운 건 알았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눈으로만 말하는 걸 보는 건 달랐다. 원래 말이 없던 사람이었으니까 더. 한마디 없이도 다 보여서. 다 알아서. 미안하다는 말을 입으로 못 하니까 눈으로 하고, 눈으로도 부족하니까 그냥 감아버리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아무것도 못 했다.


루게릭은 한꺼번에 무너뜨리지 않는다.

하나씩 지운다. 오늘은 걷는 것, 내일은 삼키는 것, 그다음은 말하는 것. 선택지가 줄어들수록 가족의 일은 늘어난다. 우리는 하루를 '살았다'기보다 '처리했다'는 말이 더 맞는 날들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하룻밤씩 버티며 생활했다.

응급차를 타고 병원을 오가며, 대리처방을 받으러 다니며, 약을 갈고, 유동식을 들이고, 석션을 하고. 어머니는 버텼고, 우리는 돌아가며 버텼다.


진료실에서 들었던 말이 끝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희망의 모양도 바뀌었다. '낫게 해 달라'가 아니라 '오늘 밤만 무사히', '예전처럼'이 아니라 '덜 괴롭게'.


그게 우리가 가진 희망의 크기였다.

그리고 그 작은 희망을 붙잡고, 우리는 3년이 넘는 와상의 시간을 기계 소리 속에서, 전화벨과 구급차 소리 속에서 하루씩, 정말 하루씩 버티며 지내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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