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속도, 말의 속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날들
아버지의 병은 아주 사소하고 흔한 얼굴로 찾아왔다.
처음엔 허리였다.
“허리가 좀 뻐근하네.”
그 말은, 뭐랄까... 그냥 날씨 이야기처럼 흘러나왔다. 일흔을 넘긴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꺼내는 말. 파스 몇 장, 뜨거운 찜질팩,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라는 종류의 통증. 우리도 그렇게 믿었다. 믿고 싶었다.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아프다”는 말을 입 밖에 내는 걸 싫어했다. 말하는 순간, 그 통증이 진짜가 되는 것 같아서. 확인 도장을 찍는 것 같아서.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묻기보다, 자기 몸을 먼저 달래고 믿는 쪽이었다.
“디스크겠지. 운동을 좀 덜 해서 그래.”
담담하게 말했다. 그 담담함이 강한 사람의 담담함인지, 불길한 걸 들키지 않으려는 방어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지금 와서야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늘 우리가 걱정하는 걸 싫어했다. 걱정은 돈처럼 불어난다는 걸, 아버지는 평생 몸으로 배워온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운동을 꾸준히 하던 사람이었다.
아침이면 뒷산을 올랐고, 저녁이면 동네 탄천을 걸었다. 땀이 빠져야 하루가 끝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허리가 아파도 멈추지 않았다. 두드리고, 스트레칭하고, 참아가며 걸었다. 그 미련한 성실함이 아버지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변화는 허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저녁, 식사 도중이었다. 아버지가 물컵을 들다가 손에서 툭, 하고 놓쳤다.
쨍그랑.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어지고 물이 퍼졌다. 우리는 동시에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급히 접어 넣고 휴지를 찾았다.
“아, 미끄러졌네. 손에 물기가 있어서...”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다 비닐봉지를 툭 떨어뜨리거나, 현관 열쇠를 구멍에 제대로 꽂지 못해 달그락거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버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이, 평소 아버지와 조금 달랐다. 웃음이 늦게 도착하는 얼굴이었다.
그 무렵부터 아버지에게 버릇이 하나 생겼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확인하는 버릇.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가, 손가락을 하나씩 펴보았다가, 손바닥을 청바지 위에 문지르며 감각을 확인했다. 마치 내 손이 내 손 같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는데, 가족들은 아무도 “왜 그래요?”라고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그 이상함이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이 될까 봐. 정말로 그게 무서웠다. 질문 하나가 문을 여는 것 같았다. 열면, 닫을 수 없는 문.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우리가 그 후로 오랫동안 “그날”이라고 부르게 된 날.
부모님은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큰일도 아니었다. 집에서 늘 하던 일. 쌀 떨어졌다고, 두부 사야 한다고, 깻잎이 싱싱하다던 마트가 있다고... 그런 이야기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낮이었다.
차 안에는 마트에서 가져온 장바구니가 비어 있었고, 어머니는 ‘할인’ 스티커가 붙은 물건들을 떠올리며 뭔가를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마트 입구를 지나 지상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4층인지 5층인지... 그때는 층수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차가 경사로를 타고 올라가는 중이었다는 것. 내려갈 수도, 옆으로 빠질 수도 없는 길. 양쪽이 가드레일로 막혀 있고, 앞차 뒤차가 촘촘히 붙어 서행하는 길.
엔진이 낮게 웅웅거렸다.
차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기어 올라갔다. 어머니는 앞유리에 비친 표지판을 흘끗 보며 “어디에 대면 좋을까” 같은 말을 하려다가 말끝을 삼켰다고 했다. 그때는 그냥 평범한 거 같지만 무서운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오른팔이 툭, 하고 떨어졌다.
힘이 서서히 빠지는 게 아니었다.
진짜로... 스위치가 내려간 것처럼. 근육으로 가는 신호가 뚝 끊겨서, 팔이 허벅지 위로 힘없이 처박혔다. 운전대 위에 있어야 할 팔이, 갑자기 있어서는 안 될 곳에 가버린 느낌이었다.
차가 경사로에서 옆으로 밀렸다.
“옆으로 틀어졌다”기보다, 경사 때문에 차가 스스로 미끄러지려는 걸 아버지가 붙잡지 못한 것처럼. 차선이 흔들렸고, 가드레일이 시야 한쪽에서 갑자기 가까워졌다.
“당신...!”
어머니의 목소리는 비명이 되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뭉개졌다.
그 대신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머니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운전석 쪽으로 숙여 운전대를 붙잡았다. 손이 운전대에 닿는 순간, 차가 끽하는 소리를 내며 꺾였다. 타이어가 바닥을 긁는 소리. 경사로 벽에 소리가 튕겨서 더 날카롭게 들렸다.
앞차 브레이크등이 번쩍 켜졌다.
뒤차가 경적을 울렸는지, 누군가 창문을 열었는지... 나는 그걸 정확히 모른다. 어머니는 다만 말했다. “옆 차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봤어.” 놀란 얼굴들이 잠깐, 아주 잠깐 스쳐 갔다고. 그게 더 수치스럽고 더 서늘했다고.
아버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오른팔은 그대로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왼손으로 운전대를 겨우 잡고, 어깨로, 온몸의 무게로 차를 중앙에 붙들어두려 했다. 손으로 운전하는 게 아니라 의지로 차를 밀어 넣는 것 같았다.
차는 그 경사로 위에서 아주 느리게, 기어가듯 겨우 균형을 되찾았다.
어머니는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 손이 운전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른팔을 왼손으로 주무르고, 꼬집고, 두드렸다. 고장 난 기계를 고치려는 사람처럼. 하지만 팔은 죽은 나뭇가지처럼 덜렁거릴 뿐이었다.
마트 주차장 구석, 사람들 눈이 잘 닿지 않는 칸에 차를 대고 엔진을 껐다. 형광등이 낮에도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졌다. 멀리서 장바구니 바퀴 소리가 끌리는 소리로 들렸다. 카트가 바닥을 긁는 소리. 그 소리가 마음을 긁었다.
그때 아버지가 휴대폰을 꺼냈다.
손이 떨렸다. 번호를 누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아버지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앞만 봤다. 마트 간판을, 주차 칸 번호를, 아무거나.
전화가 연결되자 아버지는 안부도 묻지 않았다.
“지금... 좀 와야겠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여기 마트다. 아빠가 운전이.... 안 된다.”
그 말은 부탁이 아니라 상황이었다.
자기 몸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아버지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소리였다. 아버지 인생에서 그런 소리는 흔치 않았다. 아버지는 대체로 “괜찮다”로 모든 걸 덮어버리며 살아온 사람이니까.
형이 도착했을 때, 아빠도 엄마도 무서움에 떨고 있었다.
형은 이미 운전석 문을 열어젖힌 채, 엄마와 아빠를 조심스레 부축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차 키를 받아 쥐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확실했다.
아버지는 운전석에서 내려오다 잠깐 휘청했다. 어머니가 팔을 받쳤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괜찮아” 같은 말을 하려다... 입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말이 도착하지 못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말했다.
“나, 운전 그만해야겠다.”
마치 큰 결정을 이미 내려놓고 나서, 뒤늦게 우리에게 통보하는 사람처럼. 차 키는 서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핸들을 잡는다는 건 단지 이동 수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내 몸을 통제하고 책임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고, 아버지는 그 질문 앞에서 조용히, 그러나 완전히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섰다.
그때부터 병원 순례가 시작됐다.
첫 시작은 대학병원이었다.
대학병원의 풍경은 늘 그렇듯 압도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호출 벨. 바닥을 굴러가는 휠체어 바퀴 소리. 로비의 커피 냄새가 이상하게 달았다. 헤이즐넛 향이 섞인 커피가 그날따라 코를 찔렀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데, 우리만 다른 계절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신경과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피를 말렸다.
“예약번호”가 뜨는 전광판을 뚫어지게 봤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번호였다. 번호로 불리고, 번호로 앉고, 번호로 움직였다.
첫 번째로 들은 진단명은 ‘중증근무력증’이었다.
의사는 차트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희귀 난치병이긴 하지만... 약물로 조절이 가능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가능’이라는 단어 하나에 매달렸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가능’ 하나로 하루를 버티고, 또 버틴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 있던 얼굴 어딘가에 “그래, 이 정도면...” 하는 미세한 안도감이 비쳤다. 아버지는 늘 문제를 해결로 바꾸며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이건 “죽을병”이 아니라 “풀어야 할 과제”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증상은 멈추지 않았다.
약을 먹어도, 주사를 맞아도, 몸은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어제보다 나은 것 같다”는 날이 있다가, 다음 날 “오늘은 숟가락 들 힘도 없다”가 왔다. 널뛰는 컨디션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차라리 확 나빠지면 포기라도 할 텐데, 병은 희망을 조금 보여주고는 다음 날 더 크게 뺏어갔다. 정말... 못된 방식이었다.
그 뒤로 1년 넘게, 우리는 서울의 유명하다는 병원들을 찾아 헤맸다.
‘빅 5’라 불리는 병원들을 전전했다. 한 명의 의사가 아니라 여러 명의 권위자를 만났고,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을 들었다.
검사실에서는 굵은 바늘이 근육에 박혔다.
전기가 통할 때마다 아버지 몸이 움찔했다. 아버지는 이를 악물었다. 비명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아버지가 아픈 걸 참는 게 아니라,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는 얼굴로 견딘다는 게.
병원을 다녀올 때마다 집에는 약봉지가 늘어났고, 서랍에는 판독지들이 쌓였다. 종이는 얇은데, 쌓이면 무거웠다. 그 종이들의 무게만큼 집 안 공기는 가라앉았다.
의사들의 말은 대체로 비슷했다.
“좀 더 지켜보죠.”
“아직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비전형적이라... 확진이 어렵네요.”
그 신중함이 우리를 살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끝없는 불안 속으로 밀어 넣었다. 확실한 답이 없다는 건, 희망도 절망도 확정할 수 없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밤마다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제발... 그 병만은 아니길. 그건 대화가 아니라 주문이었다. 가족 모두가 마음속에서만 키우는 주문.
그 1년 사이, 아버지의 몸은 시나브로 무너져 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걷는 속도였다.
예전엔 성격이 급해 늘 앞서 가던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 대열의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발을 끌었다.
스윽, 스윽.
아스팔트를 긁는 그 소리가, 내 심장을 긁었다. 우리는 속도를 줄였다. 대놓고 멈춰서 기다리면 아버지 자존심이 상할까 봐, 신발 끈을 묶는 척하거나 쇼윈도를 보는 척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동시에 느려지는 방식으로.
말의 속도도 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루게릭 얘기를 할 때 흔히 말하는 “말이 어눌해진다”는 그 느낌이 아버지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는 문장을 시작해 놓고 중간에서 한 번 멈췄다. 단어를 고르는 게 아니라, 숨을 고르는 것처럼. “밥 먹었냐”는 여전히 ‘밥 먹었냐’였는데,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쉼표가 하나씩 들어갔다.
우리는 그 쉼표를 좋은 징조로 착각했다. 적어도 아직은... 아직은 아니라고. 발음이 또렷하다는 사실 하나에, 가족들은 마음을 걸었다.
나는 그게 더 무서웠다.
생각은 멀쩡한데, 그 생각이 밖으로 나오는 통로가 하나씩 막히는 느낌. 아버지가 바보가 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갇히는 느낌. 안에서 다 알고 있는데, 밖으로 꺼낼 수 없게 되는...
계절은 병원 예약표를 중심으로 흘렀다.
봄이 오면 병원 창밖으로 벚꽃을 봤고, 여름이 오면 땀을 뻘뻘 흘리며 휠체어를 밀었고, 가을은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초조함 속에서 지나갔고, 겨울은 택시 창문에 김이 서리는 걸 보며 왔다.
큰 병원 로비에 앉아 있으면, 우리는 점점 ‘일상’이라는 감각을 잃어갔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밥과 일과 대화로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일상은 대기와 검사와 애매한 결과로 채워졌다. 휴대폰 캘린더에는 “회의” 대신 “신경과”가 찍혔고, 메신저에는 “자료” 대신 “오늘 어땠어?”가 오갔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루게릭병 권위자가 있다는 대학병원이었다.
그곳에 가는 길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차 안에서 아무도 “괜찮을 거야”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괜찮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이제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여야 한다는 예감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의사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 ALS, 루게릭병이 맞습니다.”
1년을 돌아 결국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이름에 도착했다.
확진을 받던 순간,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에게 따져 묻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저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앙상해진 손.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진 손.
병의 이름이 진료실 공기 속에 툭 떨어졌다.
너무 무거워서, 아무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서 “희망”이나 “완치” 같은 단어는 조심스러운 말이 됐다.
우리는 다시 병원을 다녔지만 목적이 달랐다. 낫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 아프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서.
질문도 바뀌었다.
“좋아질까요?”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나요?”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응급 상황이 터졌다.
아버지가 숨을 쉬지 못했다.
연하 기능이 약해진 상태에서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갔다. 흡인성 폐렴. 구급차 사이렌 소리. 응급실의 하얀 불빛. 의료진의 빠른 발소리.
“산소포화도가 너무 낮습니다. 기도 삽관해야 합니다.”
그 말은 의료적 판단이었지만, 우리 귀에는 통보처럼 들렸다. 이제부터는 다른 단계. 되돌아오기 어려운 강을 건너는 단계.
튜브가 들어가고, 기계가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슈욱- 칙. 슈욱-- 칙.
그 쇳소리는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의 배경음이 됐다. 아버지의 가슴은 아버지의 리듬이 아니라 기계의 리듬에 맞춰 오르내렸다. 아버지의 몸은 이제 먹고, 숨 쉬고, 배설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들조차 기계와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게 되었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 유리창 너머로 본 아버지는 우리가 알던 아버지와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얼굴은 아버지인데... 그 얼굴이 너무 멀었다. 눈은 떠 있는데, 눈동자 말고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그 절대적인 정적은 평온함이 아니라, 터질 듯한 긴장처럼 느껴졌다.
그날을 기점으로 와상 환자의 생활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더 이상 혼자 일어날 수 없었고, 침대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전체가 되었다.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하루의 의미도 달라졌다.
아침이 와도 “일어나는” 게 아니라 “눈을 뜨는” 것이 되었고,
저녁이 와도 “잠자리에 드는” 게 아니라 “그대로 있는” 것이 되었다.
몸은 점점 말보다, 생각보다 한참 뒤처졌다. 말이 마음을 따라오지 못하는 날이 아니라, 몸이 마음을 영영 따라오지 못하는 날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때서야 알게 됐다.
루게릭이라는 병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조용히 가져가는지.
‘천천히’ 진행된다는 게 왜 잔인한지.
천천히라는 말은, 준비할 시간을 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천천히 말라가게 한다는 뜻이었다. 사람을, 가족을, 매일 조금씩.
아버지는 더 이상 크게 말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잃었고, 글자판을 짚을 힘도 사라져 갔다. 대신 아버지는 눈으로 말했다. 눈으로만.
그 강인했던 사람의 눈이 어느 날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공포, 미안함, 그리고 체념.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나 좀 도와다오.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 흔들리는 눈을 보며, 가족들은 한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됐다.
평생 누군가의 등 뒤에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생애 처음으로 우리에게 체중을 실어 ‘기대기’ 시작한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는 걸.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무거운 몸과 마음을 받아 안아야 할 차례가 왔다는 걸.
그게 시작이었다.
정말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