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하지 못한 설계도
장례가 끝나고 아버지의 서랍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서랍 깊숙한 곳, 낡은 양말 뭉치 뒤에서 녹색 구형 여권 하나가 툭 떨어졌다. 유효기간이 오래전에 끝난 여권이었다. 표지의 금색 문장도 손때에 닳아 흐릿했다.
나는 무심코 그 여권을 펼쳤다가 멈칫했다.
사진 속의 남자. 젊고, 단단하고, 무엇보다 눈빛이 살아 있는 남자.
아버지였다.
그 페이지에는 1970년대 후반, 독일 베를린 공항의 입국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도장을 보는 순간, 아버지가 술기운을 빌려 가끔, 아주 가끔 꺼내놓던 '화려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낡은 필름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꿈을 멀리서만 바라본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꿈의 가장자리까지, 때로는 그 중심부까지 걸어가 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쉽게 과장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가봤다'는 자부심과 '끝까지 못 갔다'는 회한이 늘 공존했다.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 아버지는 누구보다 성실했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이 남긴 습관이었을까. 아버지는 게으름을 죄악처럼 여겼다. 출근은 늘 남들보다 30분 빨랐고, 퇴근은 늘 가장 늦었다. 회식 자리에서도 끝까지 남아 상사들을 챙겼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가장 먼저 사무실 불을 켰다. 말을 아끼고 결과로 답하는 그 우직함은 결국 빛을 봤다. 입사 5년 차 되던 해, 아버지가 '우수사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회사 로비 게시판에 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붙었고, 기념패를 받아왔다. 그것은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난이나 성실함 같은 꼬리표 대신 온전히 '능력'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공식적인 훈장이었다.
그 보상으로 아버지는 독일로 1년간 기술 연수를 떠났다.
처음 타본 장거리 비행기. 기내식 냄새와 건조한 공기. 아버지는 그 낯선 감각을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으로 받아들였다.
독일은 아버지에게 신세계였다. 공장 바닥에서 하루를 보내는 ‘현장’이라기보다, 연수실과 회의실, 그리고 거래처를 오가며 배우는 자리였다. 장비 앞에서 실습을 하고, 데모를 보고, 파트너사 사람들과 짧게나마 말을 주고받는 날들이 이어졌다.
여권 사이에 끼워져 있던 작은 수첩을 펼치자, 빽빽한 독일어 단어장 사이로 볼펜으로 꾹꾹 눌러 그린 그림 하나가 나왔다. 마당이 넓고 2층 창문이 큰 집. 그 아래에는 My Dream House라고 투박하게 적혀 있었다.
“시스템이 사람을 지킨다. 여기 기술자들은 당당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단순히 기계 다루는 법만 배운 게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배웠다. 정해진 시간에 퇴근해 가족과 저녁을 먹는 문화, 기술자를 우대하는 분위기. 퇴근길 펍에서 흑맥주를 마시며, 아버지는 노트에 빽빽하게 미래를 적어 내려갔다. 돌아가면 회사에 어떤 방식을 가져올지, 10년 뒤엔 어떤 자리에 서 있을지, 그리고 은퇴 후엔 마당 있는 집을 지을지.
그때 아버지 머릿속에는 튼튼하고 근사한 인생의 밑그림이 있었다.
‘이렇게만 하면, 흔들리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겠다.’
그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노력하면 닿을 거라는 젊은 확신이었다.
귀국 후, 아버지는 빠르게 승진했다.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부장' 직급을 달았다.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면 아버지는 화제의 중심이었다. "역시 똑똑해", "대기업 부장님은 다르네".
가난한 막내 취급을 받던 아버지가 집안의 자랑이 된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그 시선을 즐기면서도, 결코 거만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조심했고, 더 무겁게 책임감을 짊어졌다.
하지만 그때부터, 일이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세상은 아버지가 독일에서 배워온 합리적인 설계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직속 상사는 오로지 자기 성과와 승진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합리는 사라지고 정치가 판을 쳤다.
"민 부장, 이번 프로젝트 무조건 이번 달 안에 끝내. 안 되면 자네가 책임지고."
설명되지 않는 압박,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쥐어짜는 명령,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아래로 미루는 구조.
아버지는 그 폭력적인 구조 안에서 묵묵히 버텼다.
문제를 제기하면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찍혀 일이 더 꼬일 거라는 걸, 조직의 생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롭힘은 소리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공개적인 회의 자리에서는 칭찬을 듣고, 돌아서면 말도 안 되는 업무 폭탄이 떨어졌다. 성과는 상사가 가져갔고, 야근과 스트레스는 아버지의 몫으로 남았다. 아버지는 일을 못해서 힘든 게 아니었다. 일을 잘해도, 아니 일을 잘할수록 더 이용당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그 기형적인 구조가 아버지를 갉아먹었다. 퇴근 후 현관문에 들어서는 아버지의 어깨에서는 늘 젖은 솜뭉치 냄새가 났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 그리고 삭히지 못한 울화의 냄새였다. 아버지는 현관에 들어서기 전, 늘 한숨을 깊게 내쉬고 억지 미소를 지은 채 문을 열었지만, 우리 눈에는 그늘이 먼저 보였다.
그러다 한 번, 선택지가 생겼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이었던 사장이 중소기업 임원직을 제안한 것이다. 연봉은 비슷했지만 규모는 훨씬 작았다. 대신 역할이 컸고, 결정권이 있었다.
"민 부장 같은 사람이 와서 우리 회사 체계 좀 잡아줘요."
아버지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대기업이라는 간판을 버리는 것이 두렵지 않냐고 어머니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도망가는 게 아니야. 방향을 바꾸는 거지."
아버지는 자신의 설계도를 수정했다.
더 높은 곳으로 가는 사다리 대신, 내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집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다시 물 만난 고기처럼 일했다. 사람들과 직접 부딪히며 일했고,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하루 종일 회의실에 갇혀 있는 대신 현장을 누볐고, 보고서의 줄간격을 맞추는 일보다 사람의 눈을 맞추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오랜만에 일하는 재미를 느끼는 듯했다. 독일에서 꿈꿨던 ‘시스템’을 작게나마 현실에 옮겨보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그 회사는 출장이 잦았다. 특히 동남아 쪽이 많았다.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나라 이름이 달력 위에 찍히듯 붙었다. 공항과 공장, 호텔을 반복해서 오갔고, 가방은 풀었다 싶으면 다시 닫혔다.
아버지는 “거긴 덥다” 같은 말만 툭 하고 남겼지만, 그 말 뒤로는 늘 피로가 따라왔다.
하지만 그 대가는 육체적인 마모였다. 회사를 키우기 위해 잦은 해외 출장이 반복되었다.
비행기 마일리지는 쌓여갔지만, 아버지의 몸은 시차와 피로에 절여져 갔다.
흔들리는 기내 안에서 쪽잠을 자고, 낯선 호텔 방에서 혼자 눈을 뜨는 날들이 이어졌다. 새벽에 전화하면 아버지는 종종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헷갈려했다.
"어... 그래, 아빠다. 여기가... 하노이던가? 상하이던가?"
수화기 너머로는 아버지의 잠긴 목소리와 함께, 텅 빈 호텔 방 특유의 '웅-' 하는 미니 냉장고 소리만이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방, 대화할 사람이라곤 한국에 있는 가족뿐인 그 절대적인 고독이 전파를 타고 느껴졌다. 몸은 회복할 틈을 잃어가고 있었다. 건강검진 결과표에는 '주의'를 요하는 수치들이 빨간색으로 늘어났다.
아버지는 "괜찮다, 영양제 먹으면 된다"라고 웃어넘겼지만, 얼굴에 쌓인 검은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아침마다 코피를 쏟는 날이 잦아졌고, 주말에는 시체처럼 잠만 잤다.
결국 아버지는 몇 년 만에 사표를 냈다. 더 이상 이동하는 삶은 버티기 어려웠다. 몸이 먼저 강렬한 신호를 보냈고, 이번에는 그 신호를 무시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몸만 문제였던 건 아니었다. 나라 전체가 갑자기 숨이 가빠지던 때였다. IMF. 뉴스에서는 연일 ‘부도’와 ‘구조조정’이란 말이 흘러나왔고, 그 말은 회사 안으로 그대로 들어왔다.
“비상경영 들어갑니다.” “비용부터 줄이죠.” “인력 효율화가 필요합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뜻은 하나였다. 사람을 줄이겠다는 것.
출장은 줄지 않았고, 대신 성격이 바뀌었다. 예전엔 ‘다녀오세요’로 끝나던 일이, 어느 순간부터는 ‘이번 건 못 따오면’ 같은 문장으로 이어졌다. 실적이 곧 사람 값이 되던 시기였다. 법인카드도 눈치가 됐고, 회의는 늘었고, 회의실 공기는 더 건조해졌다. 누가 먼저 잘릴지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 다들 알고 있는 분위기. 아버지는 그 속에서 더 말이 없어졌다.
가족을 위해 일한다면서, 정작 가족 곁에 있을 수 없는 모순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IMF 이후에는 그 모순이 더 잔인해졌다. 버티고 싶어도 몸이 버티지 못했고, 몸이 버티더라도 회사가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계속 다니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다시 한번 핸들을 꺾었다.
도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방향 전환. 이번에는 조직 밖으로.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이 자영업이었다. 퇴직금을 털어 작은 식당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말 우리 삶이었다. 아버지 혼자 꾸린 게 아니었다. 어머니가 같이 들어갔다. 앞치마를 매고 주방과 홀을 오가며, 장사라는 걸 가족이 같이 버텼다.
상사의 눈치도, 거래처의 갑질도 없는 대신, 손님 눈치와 재료값 눈치가 있었다. 오로지 자기 판단으로 여는 하루.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셔터를 올리고, 밤 11시에 셔터를 내리는 생활. 주말도 휴일도 없는 나날들. 손에 남는 건 돈보다 피로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그건 온전히 두 사람의 땀이었다.
가게 한구석, 계산대 옆에는 항상 아버지의 작은 수첩이 놓여 있었다.
젊은 시절 꿈을 적던 그 노트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12,000원 x 30그릇 = 360,000원... 가스비... 월세...'
대기업에서 배웠던 복잡한 기술은 이제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건 먹고살기 위한 덧셈과 뺄셈뿐이었다. 예전엔 노트 한쪽에 마당 넓은 집 같은 걸 끄적여놓고도, “언젠가는”이라는 말을 붙이곤 했는데, 가게를 열고 나서는 계산기만 두드렸다. 이번 달은 얼마가 남는지... 아니, 얼마나 모자라는지.
머릿속에 있던 밑그림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모양이 바뀌었다. 근사한 집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편안하게 행복하게 사는 집이었으면. 그 정도면 됐다고 스스로를 달래는 쪽으로. 그것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다.
불안은 늘 있었다. 셔터 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처럼, 손님 없는 텅 빈 테이블 사이로 스며들었다. 바닥을 닦고 의자를 다시 맞춰놓고 메뉴판을 세워놔도... 그 틈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IMF가 터지고, 사기를 당해 가게 문을 닫게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실패했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다만 "운이 없었다"라고, "잠시 멈추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인생의 설계도를 완주하지 못했다는 것을. 독일의 선진 시스템을 한국에 심겠다던 꿈, 멋진 임원이 되어 은퇴하겠다던 꿈, 내 가게를 번듯하게 키워 편안한 노후를 보내겠다던 꿈. 그 모든 길은 결국 중간에서 끊기거나, 다른 방향으로 꺾여버렸다.
여권 속의 아버지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데, 지금의 아버지는 잔디장 아래 조용히 묻혀 있다. 나는 아버지의 낡은 여권을 덮으며 생각했다. 아버지의 인생은 미완성일까. 설계도대로 지어지지 않은 집은 실패한 건축일까.
가만히 눈을 감고 아버지의 궤적을 복기해 본다.
대기업 부장, 중소기업 임원, 그리고 식당 사장님. 직함은 계속 낮아졌고, 규모는 계속 작아졌다. 겉으로 보면 추락하는 그래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굴곡진 선들 사이에서, 단 한 번도 끊기지 않고 굵게 이어진 선 하나가 있었다. '가족을 책임진다'는 선.
독일의 낯선 땅에서도, 대기업 상사의 폭언 앞에서도,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리고 파리 날리는 가게의 좁은 카운터에서도. 아버지는 그 선 하나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버텼다. 자신의 꿈이 지워지고 수정되는 동안에도, 우리 가족의 밥그릇과 지붕만큼은 꿈에서 지워내지 않았다.
나는 이제야 그걸 본다.
아버지가 꿈이 없어서 현실에 안주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꿈을 여러 번 다시 그려야 했던 사람이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상황에 맞춰, 자신의 자존심과 욕망을 깎아내며 설계도를 수정하고 또 수정했던, 세상에서 가장 고단한 기술자였다.
아버지의 인생은 결국 완주되지 못한 설계도로 남았다. 그가 꿈꿨던 화려한 도착지에는 끝내 깃발을 꽂지 못했다. 하지만 그 찢어지고 덧대어진 너덜너덜한 설계도 위에서, 우리는 무너지지 않고 자랐다. 비를 피했고, 밥을 먹었고,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자기 인생의 목적지에는 닿지 못했지만, 우리의 삶만큼은 등에 업고, 끌고, 밀어서 끝까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준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의 낡은 여권 속에 담긴 그 설계도는 충분히 위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