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무너질 때, 살아남으려다 당한 배신
그때는 모두가 급했다.
계절은 분명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날씨보다 환율을 먼저 봤다. 아침마다 숫자가 바뀌었다. 뉴스는 하루 종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구제금융”, “긴축”, “구조조정”. 그 단어들이 처음엔 낯설었는데, 금방 익숙해졌다. 익숙해진다는 건... 그게 내 일이 된다는 뜻이었다.
거리의 공기도 달라졌다.
뉴스에서 “구조조정”이 나오면 어른들이 말하던 걸 멈췄다. 잠깐 정적이 생겼고, 그 정적이 더 무서웠다.
그때부터였다. 세상이 아주 사소한 데서부터 조금씩 달라지는 게.
친구네 집은 갑자기 이사를 간다고 했다.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다들 묻지 않았다. 그때는 묻는 쪽이 더 조심스러웠다.
회사 앞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 표정이 달랐고, 은행 앞 줄이 길어졌다. 금리가 오른다, 대출이 막힌다, 신용이 ‘사라진다’는 말이 돌았다. 나는 ‘신용’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게 사라지면 사람이 같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골목마다 ‘폐업’ 딱지와 ‘급매’ 현수막이 늘어났다. 대기업도 흔들린다는 말이 돌았고, “정리해고”라는 단어가 진짜 사람을 잘랐다. 어떤 집은 아버지가 실직해서 낮부터 집에 있었고, 어떤 집은 대리운전이나 막일로 밤을 새우느라 새벽에야 들어왔다.
그 무렵 ‘집’이라는 건 휴식처가 아니라, 체면이 마지막으로 붙어 있는 곳 같았다. 나는 수능 날짜를 세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쪽에서는 ‘아버지가 버티는 날짜’도 같이 세고 있었다. 말로는 아무도 그런 걸 말하지 않았는데... 그냥, 공기가 그랬다.
당시 우리 집은 수도권에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일터, 우리 가족의 생명줄이 걸린 가게는 기차를 타고 4~5 시간은 족히 가야 하는 경상도의 대도시 역전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자주 가족이 모일수 있진 않았다. 365일 문을 여는 역전 식당에 휴일이란 사치였다. 대신 우리가 내려갔다. 금요일 학교가 끝나면 대학생인 누나와 형이랑 같이 가방을 메고 영등포역으로 향했다. 무궁화호 입석 표를 끊어 덜컹거리는 기차 연결 통로에 쭈그리고 앉아 내려갔다. 여행 가는 설렘 따위는 없었다. 일손이 부족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부모님을 도우러 가는 '지원군'의 비장함 같은 것이었다.
역에 도착해 익숙한 가게 문을 열면, 훅 끼쳐오는 음식 냄새와 시끌벅적한 소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땀에 젖어 뛰어다니는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왔나." 그 짧은 한마디. 아버지는 우리를 보자마자 안도와 미안함이 섞인 눈으로 웃었다. 우리는 가방을 구석에 던져두고 앞치마를 둘렀다. 서빙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무거운 철가방을 날랐다. 전쟁 같은 주말 장사가 끝나고 셔터를 내린 뒤, 식은 밥에 남은 반찬을 비벼 먹으며 TV를 켜는 순간. 그제야 아버지의 굳은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 소박한 소음이 들려야 비로소 우리 가족은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몸은 고단했지만, 적어도 우리가 뭉쳐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IMF가 터지고 나서는, 그 당연했던 순서마저 뚝 끊겼다. 손님들의 발길이 거짓말처럼 끊겼다. 매출이 반 토막, 아니 3분의 1로 줄었다. 기차비 몇 푼조차 아까워지는 날들이 시작됐다. 하지만 돈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려가서 마주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다. 텅 빈 가게에 우두커니 앉아 TV 뉴스만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 파리 날리는 홀에서 마른행주질만 반복하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어, 우리는 차라리 핑계를 대고 내려가지 않는 날이 늘었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그리고는 "다음에 갈게요"라는 기약 없는 말로 넘어갔다.
전화할 때마다 아버지 목소리가 달라졌다.
"괜찮다. 바빠서 그래. 차비도 비싼데 오지 마라. 공부나 해라."
"다음에... 상황 좀 좋아지면 그때 보자."
근데 그 ‘다음’은 자꾸 미뤄졌다. 주말이 지나고, 월말이 지나고, 달력이 넘어가도.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 들은 이야기다.
아버지가 가게 안쪽 창고에 이불을 깔아놓고 거기서 잤다고 했다. 어머니도 같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장을 봐야 했고, 밤 열한 시에 문 닫고 설거지하고 정리하면 자정이 넘었다. 집까지 왔다 갔다 할 시간도, 기름값도 아까웠다. 그 겨울엔 ‘아깝다’가 그냥 표현이 아니었다.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하루가 하루를 버티는 데로만 쓰이는 때.
창고는 추웠다. 난방이 안 됐다.
손님 있을 때만 가게 쪽 보일러를 틀었는데, 창고까지는 온기가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두꺼운 점퍼를 입고 이불을 두 개 덮고 잤다. 그래도 밤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고 했다. 추위가 아니라... 내일이 더 차가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가끔 밤중에 창고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쥐였다.
식자재 냄새를 맡고 들어온 쥐들이 박스를 뜯고 비닐을 찢었다. 천장에서 후다닥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 여기서 못 자겠어.”
어머니가 울먹이면 아버지는 늘 같은 말을 했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그 ‘조금’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랐다.
가게는 역 앞 대로변이었다. 입지는 좋았다.
처음엔 장점이었다. 사람 흐름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 겨울엔 그게 독이 됐다. 월세가 살인적이었다.
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식당 문을 열지 않았다. 다들 주머니에 손을 깊게 찔러넣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쳤다. 점심시간에도 테이블 절반이 비었다. 저녁엔 더 심했다. 예전엔 자리 없어서 줄을 서던 가게였는데, 이제는 손님 한 명 들어오면 반가워서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반갑다는 감정이 아니라... '오늘 공칠 뻔했는데 살았다'는 안도감. 그 정도의 비참함.
아버지의 낡은 장부에는 빨간 숫자가 쌓였다.
매출은 내려가는데 월세는 그대로였다. 식자재비, 전기세, 가스비, 주방과 홀 이모 월급. 나가는 돈은 줄지 않았다. 줄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식자재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이번 달은 좀... 다음 달에 같이 드릴게요.”
“미수로 조금만 넘어가면 안 될까요.”
처음엔 이해해줬다. 다들 힘든 시기니까.
그런데 석 달, 넉 달 지나니까 목소리가 바뀌었다.
“김 사장님, 저희도 힘듭니다.”
“이번엔 현금으로 주셔야겠어요.”
“이번 달 안에 정리 안 하시면 거래 중단입니다.”
기다려줄 사람은 없었다. 다들 급했으니까. IMF라는 건 결국, ‘기다려주는 여유’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친정에 전화를 걸었다.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며.
“언니... 미안한데... 조금만...”
친척들에게도 손을 벌렸다.
빌릴 곳은 다 빌렸다.
그래도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김 씨가 나타났다.
식자재를 납품하던 유통업자. 평소에도 얼굴 보이던 사람. 가게로 들어와 소주 한 병을 펼쳤다. 그 사람이 특별히 반짝이거나 화려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더 믿기 쉬웠다.
“형님, 요즘 어떠세요.”
“뭐... 그냥 버티는 거지.”
“다들 힘들죠. 저도 망할 것 같습니다.”
김 씨는 한숨을 섞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형님, 좋은 거 하나 알아봤는데요.”
유통이 무너졌고, 물건 값이 요동치고, 지금이 오히려 기회라는 말. 헐값에 쓸어 담아놓으면 몇 달 뒤에 판이 뒤집힌다는 말. 중국 쪽 라인을 뚫었고, 대량으로 들여오면 원가가 확 줄어든다는 말.
“계약금이 필요해요. 한... 일억 정도요.”
일억.
아버지가 잠시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동안, 가게 안에서 냉장고 모터 소리만 들렸을 것 같다. 사람이 숨을 삼킬 때, 별 소리가 다 크게 들린다.
김 씨가 아버지 손을 잡았다.
“형님, 지금 아니면 우리 다 죽습니다. 마지막 기회예요.”
평소 같았으면 아버지는 안 했을 거다.
꼼꼼하게 따지고, 서류 확인하고, 계약서 쓰고.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대기업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었고, 네 가지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영어로 계약서를 읽고, 독일어로 기술 문서를 보던 사람. 그런 사람이... 한순간에 ‘말’에 기대는 사람이 될 수 있다니, 지금도 이상하다.
그런데 그때는 달랐다. 월세가 두 달 치 밀려 건물주에게 독촉을 받고 있었고, 거래처 미수금 때문에 물건이 끊길 판이었고, 어머니는 창고 구석에서 쥐 소리를 들으며 매일 밤 울고 있었다. 수도권에 있는 자식들에게 학비를 보내야 할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다.
“밥은 굶지 않고 먹냐.”
“학비 내는 날은 언제냐.”
아버지는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 가진 걸 잃지 않고 싶어서였다.
가게, 가족, 가장이라는 자리.
아버지가 돈을 모았다. 남은 돈을 긁어모으고, 빌릴 데를 빌리고, 카드론까지 받았다. 그 시절 우리 집 전세금이 얼마였는지 떠올리면... 그 일억은 거의 전부였다.
“김 사장, 이거 내 목숨 같은 돈이야.”
봉투를 건네는 아버지 손이 떨렸다.
김 씨는 그 손을 꽉 잡고 말했다.
“형님, 저 믿으세요. 두 달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처음 한 달은 연락이 잘 됐다.
“중국 가서 확인 중입니다.”
“계약 거의 마무리됐어요.”
“다음 주면 첫 물량 들어옵니다. 형님, 이제 우리 살았습니다.”
그 말들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더 믿기 쉬웠다. 세상이 엉망이었고, 누구나 '조금만', '다음 주면' 같은 희망 고문으로 하루를 버티던 때였으니까. 나라가 "금 모으자"고 외치던 시절이었다. 진짜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 돌 반지, 결혼반지까지 내놓았다. 그만큼 절박했다. 그 절박함 속에서는, 누군가의 '확신'이 유일한 도피처가 된다.
한 달 반.
“세관에서 문제가 좀 생겼어요. 뇌물을 좀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달.
전화가 잘 안 됐다. 신호음만 길게 울리다 끊겼다.
두 달 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아버지는 김 씨 사무실로 찾아갔다.
지방 도시 외곽, 허름한 상가 건물 2층.
문은 잠겨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김 사장님!”
문을 두드리고 발로 찼지만, 대답은 없었다.
관리인이 지나가다 툭 말했다.
“거기요? 일주일 전에 짐 빼고 나갔어요. 월세도 밀렸던데. 아저씨도 돈 떼였수?”
아버지는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텅 비어 있었다.
책상도, 의자도, 집기도 없었다. 바닥에 찢어진 서류 몇 장,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 그리고 책상 위에 껍질이 벗겨진 채 말라 비틀어진 자장면 그릇 하나. 단무지 조각 하나가 덩그러니 말라붙어 있었다.
그게 우리의 전재산이였던 일억 원과 맞바꾼 풍경이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한참 서 있었다고 했다. 소리를 지르지도, 문을 부수지도 못했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고, 숨이 안 쉬어졌다고 했다. 세상의 소리가 웅웅거리고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이 관용구가 아니라 진짜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말을 잃었다.
가게로 돌아와서도 어머니에게 바로 말하지 못했다.
“그 사람 연락 됐어요?”
“응... 조금 늦어진대.”
거짓말이었다.
어머니도 아마 알았을 것이다. 눈빛이 죽어 있었으니까.
일주일쯤 지나서야 아버지가 말했다.
“돈... 날아갔어.”
어머니는 주저앉았고, 창고 쪽에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고, 어머니는 나중에 말했다.
우리에게 전화가 왔을 때, 아버지 목소리는 고 건조했다.
“애들아...”
“아빠가... 미안하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그냥... 아빠가 실수를 좀 했어. 근데 괜찮아. 아빠가 다 해결할게.”
그 ‘해결’이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다.
며칠 뒤 어머니가 울면서 전화했을 때, 우리는 알았다. 가게가 문을 닫았다는 걸. 빚쟁이들이 찾아오고, 결국 모든 걸 정리했다는 걸.
가게는 결국 문을 닫았다. 월세를 못 냈고, 미수금을 갚을 길이 없었다. 가게 물건들은 헐값에 빠져나갔다. 테이블, 의자, 냉장고, 주방 기구. 정리하고 나니 손에 남은 게 없었다. 빚만 남았다. 그렇게 아버지의 치열했던 50대는 빈 자장면 그릇처럼 텅 비어버렸다.
그 뒤로 아버지는 사람을 잘 믿지 않았다.
누가 좋은 이야기를 하면 “왜?”부터 물었다. 약속은 문서로 남겨야 했고, 거래는 현금이 편했다. 예전의 넉넉한 웃음은 사라졌다. 웃음이 사라진 자리엔, 말을 아끼는 버릇이 남았다.
몇 년 뒤, 술에 취해 아버지가 말했다.
"아들아, 사기당한 게 제일 억울한 게 아니다."
"...그럼요? 그 김 사장 나쁜 놈이잖아요."
"그놈도 오죽했으면 그랬겠냐... 그게 아니라, 그때 내가 너무 급했다는 게... 그게 제일 억울해."
아버지는 몇년동안 끊었던 담배를 입에 물었는데, 불을 붙이지 않았다. 그냥 물고만 있었다.
“급하니까 바보가 되더라.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거야.”
IMF는 끝났고, 나라는 빚을 갚았다고 했다.
금 모으기 운동의 기적이 뉴스를 장식했고, 경제가 살아났다고도 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 남은 건 통장 잔고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 겨울 이후로 말을 늦게 했다.
아니, 말이 늦어진 게 아니라...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전화벨이 울리면 한 박자 멈췄고, 누가 “괜찮으세요?” 하고 물으면 “괜찮다”부터 내뱉었다.
진짜 대답은 늘 그 다음에 있었는데, 그 다음은 잘 오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는 손부터 움직였다. 장부를 펼치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종이를 정리하고, 급한 일이 생기면 먼저 얼굴을 굳혔고, 그 다음에 조용히 방향을 바꿨다. 사람을 믿기 전에는 확인부터 했다. 약속은 기록해뒀고, 돈은 숫자로 붙잡아뒀다.
나는 그게 ‘조심성’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냥 나이를 먹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루게릭이 시작됐을 때,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프다는 말도, 무섭다는 말도... 원래부터 잘 하지 못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말 대신 눈으로 묻고, 말 대신 손끝으로 버티던 사람.
나중에 병실에서 아버지가 입을 열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종종 그 겨울을 떠올렸다.
텅 빈 사무실 문 앞에서 아버지가 처음 배운 것.
세상이 무너질 때, 급할수록 말은 힘을 잃고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말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혼자서 견뎌야 하는 '버티는 습관'만이 남는다는 것.
아버지는 그때부터 이미,
조용히 아파하고, 조용히 무너지고, 조용히 다시 일어서는 법을 뼈저리게 배워버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