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편지 : 10번의 안부

4화. 무채색 도시 위로 낭만을 덧칠하다

by 빈스

내가 나고 자란 인천은 흔히 회색의 도시라고 불려요. 거대한 부두의 녹슬어가는 크레인들,

끝없이 이어진 차가운 아스팔트,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얼룩진 낡은 아파트들까지. 사람들은 낭만을 찾기 위해

공항으로 달려가 멀리 떠나지만,

나는 매일 마주하는 이 투박하고 거친 풍경들

속에서 나만의 영화를 발견하곤 해요.

사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은 생각보다

더 무채색에 가깝잖아요.

매일 똑같은 출근길, 익숙해서 더는 눈길이

가지 않는 동네 골목에서 특별한 색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하지만 나는 이 밋미한 풍경 위에 마음의 온도를 한 겹 덧칠하며 나만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갑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기억의 질감이나 비워둔 여백이 실제로 어디에 쓰이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나에게 그 모든 고민의 실험장은 바로 이 도시의 길거리예요. 공단의 차가운 금속 난간 위에 내가 입힌 거친 입자들이 내려앉으면, 그것은 더는 차가운 쇳덩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때와 시간을 견뎌낸 부드러운 흔적이 됩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전신주와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 사이로 여백을 찾아내면,

그 틈으로 비로소 도시의 하늘이 숨을 쉬기 시작하고요. 내가 가진 작업 방식들은 결국 이 무채색의 도시를

조금 더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기 위한 일종의 안경이었던 셈이에요. 낡은 담벼락에 비치는

오후 다섯 시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

그 찰나의 빛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이 머물 때

평범한 골목은 비로소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변합니다. 나는 현실을 왜곡해서 화려하게 포장하고 싶지 않아요. 대신 그 투박한 현실 속에 숨어 있는 본연의 결을 찾아내어, 이 도시가 얼마나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증명하고 싶을 뿐이에요.





나에게 사진을 매만지는 시간은 단순히 기술적인 작업이 아니에요. 무채색 일상에 내가 느낀 감정의 농도를 입히는, 일종의 번역에 가까워요.

부두의 짠 바람이 섞인 공기를 따뜻한 갈색조로 번역하고, 퇴근길 사람들의 지친 어깨 위로 쏟아지는 노을을 조금 더 포근한 색으로 눌러 담아 봅니다. 그렇게 하면 낡고 보잘것없어 보이던 상점의 빛바랜 간판이나 좁은 골목길도 어딘가 아련하고 그리운 기억의 조각으로 바뀌어요. 이건 세상에 없는 색을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잊고 살았던 도시의 진심을 다시 꺼내 보는 과정이에요. 회색빛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누군가에겐 오늘 하루를 잘 버텼다는 안도가 될 수 있고, 녹슬어가는 철문도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첫사랑의 이정표가 될 수 있으니까요. 나는 기록가로서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의 층위들을 사진 위에 정성껏 쌓아 올립니다.



기록가로 살며 내가 배운 가장 값진 교훈

아름다움은 결국 발견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거예요.

아무리 비싼 장비가 있어도, 아무리 유명한 여행지에

서 있어도 자기만의 시선이 없으면 그 풍경은 그저 평면적인 정보에 불과해요. 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초라한 길 위라도 애정을 담아 바라본다면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무대가 되죠.

오늘 당신이 걷는 퇴근길이 유독 고단하고

무채색으로 느껴진다면 잠시만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세요. 낡은 상점 간판 위로 떨어지는 빛의 각도나 보도블록 사이로 삐져나온 이름 모를 풀꽃 같은 것들이 당신에게 말을 걸지도 몰라요.

비행기 티켓을 끊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그 익숙한 공간 위로 당신만의 따뜻한 시선을 한 방울 섞어보세요.

그렇게 기록된 당신의 하루는 그 어떤 영화보다 아름다운 한 장면으로 남을 테니까요.


무채색의 세상도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충분히 낭만적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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