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비워둘수록 선명해지는 것들
2화에서 제가 사진 위에 거친 입자를 채우고 공기를 불어넣는다고 말했었죠.
그런데 그렇게 채워진 질감들이 제 역할을 하려면 역설적으로 넓은 자리가 필요해요.
질감이 기억의 온도라면, 여백은 그 온도가 머무는
방 같은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조색을 할 때 단순히 색을 만지는 것보다, 그 색들이 충분히 숨 쉴 수
있도록 주변을 정리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여요.
우리는 무언가를 채워야만 완성된다고 믿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사진을 찍을 때도 프레임 안에 멋진 풍경을 가득 담으려 애쓰고, 보정을 할 때도 더 화려한 색과 선명한 대비로 빈틈을 메우려 하죠.
하지만 꽉 찬 것들은 의외로 금방 질리고,
때로는 숨이 막히기도 해요.
2화에서 이야기한 '입자'와 '공기'도 마찬가지예요. 화면 전체가 복잡한 피사체로 꽉 차 있다면,
제가 공들여 심어놓은 그 서걱거리는 질감들은
그저 노이즈나 지저분한 얼룩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질감이 제 목소리를 내려면, 그 질감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빈 벌판이 필요하거든요.
사진을 찍다 보면 그런 날이 있어요.
눈앞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것저것 다 담았는데,
막상 모니터로 확인하면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를 때요.
욕심이 시선을 가린 거죠.
바로 그때 저는 '여백'의 힘을 빌려요.
'여백의 편지' 시리즈를 작업할 때
제가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어디까지 덜어낼 수 있을까"였어요.
채도가 높은 색들을 걷어내고, 복잡한 피사체
사이의 간격을 벌려주는 일. 그렇게 화면에 빈자리가 생기면 그제야 주인공이 말을 걸기 시작해요.
여백은 버려진 공간이 아니에요.
사진 속 피사체가, 그리고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숨구멍이에요.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문장 사이의 침묵이
더 깊은 울림을 주듯, 사진에서도 비워둔 그 자리가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네곤 하죠. 제가 입힌 거친 입자들은 바로 그 빈 공간의 정적 속에서 비로소 '기억의 질감'으로 살아나요.
사실 제가 프리셋에 '편지'라는 이름을 붙인 건 거창한 이유가 아니에요. 제 사진이 저 혼자만의 일기로
끝나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100% 꽉 채워진 사진은 마치 정답이 정해진 문장 같아요. 보는 사람이 감탄할 순 있겠지만, 자기 감정을 끼워 넣을 틈은 없죠.
하지만 적당히 비워진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여운이 돼요. 제가 채도를 낮추고 대비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건, 당신의 기억이 그 위에 자연스럽게 얹히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제가 만든 색감이 결론을 내리는 마침표가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쉼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기록가로서 제가 하는 조색은 완벽한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각자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작은 틈을 열어두는 일이라 믿어요.
결국 사진이나 삶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여러 가지 일을
놓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각기 다른 일들 사이의
'여백'을 즐기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어요.
어느 한 가지 일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른 일로 넘어가는
그 찰나의 틈들이 저를 숨 쉬게 하거든요.
그 틈이 있어야 다시 카메라를 들 힘이 생기고,
다시 펜을 잡을 마음이 생기니까요.
오늘 찍은 사진이 너무 복잡해 보인다면,
혹은 오늘 하루가 너무 버겁게 느껴진다면
잠시 멈춰서 무엇을 덜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 보세요. 하나를 포기하고 비워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때로는 비어있기에 더 아름답고, 흐릿하기에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어요.
저의 이 여백 어린 편지들이 당신의 복잡한 하루에
작은 숨구멍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비워낼수록 더 선명해지는 당신만의 소중한 가치를 꼭 찾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