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편지 : 10번의 안부

2화 선명함보다 중요한 건 기억의 질감이에요

by 빈스


우리는 완벽한 화질의 세계에 살고 있어요.


손안의 스마트폰은 실물보다 더 선명하고,

카메라는 매년 더 깨끗한 렌즈를 내놓아요.
​바로 그런데 저는 매일 밤 모니터 앞에 앉아

그 깨끗한 사진 위에 일부러 노이즈를 뿌리고

색을 바래게 만들어요.

"왜 비싼 장비로 찍은 사진을 낡게 만드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근데 제게 기억은 선명한

4K 영상처럼 남아있지 않거든요.




기억은 픽셀이 아니라 공기의 층위로 남아요


​사랑했던 어느 오후를 떠올려 봐요.

그날의 공기, 눈빛, 햇살의 농도가 완벽한 초점으로 기억되나요? 오히려 기억은 조금 흐릿하고 어딘가 바스러질 듯한 질감에 가까워요.

바로 시간이 지나며 모서리가 닳은 오래된 종이처럼요.
​그래서 제 사진에는 유독 거친 입자가 많아요.

픽셀의 차가운 매끄러움을 지우고 그 자리에 서걱거리는 질감을 채워 넣어요.

이건 단순히 예쁘게 보이려는 보정이 아니에요.

차갑게 박제된 이미지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과정이에요.





빛바랜 낭만이 건네는 진실


​최근 작업한 '연의 편지' 시리즈는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었어요.

가장 밝은 곳은 조금 누르고 어두운 부분은 살짝 들춰내어 그사이에 공기를 채웠어요.

쨍한 원색의 화려함보다는 수만 번 손길을 거쳐 부드럽게 마모된 빛을 찾고 싶었거든요.
​기록가로 살며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선명함이 그날의 '사실'을 전달한다면,

질감은 그날의 '진실'을 전달한다는 거예요.

사실은 기계가 본 것이고, 진실은 내 마음이 느낀 것이니까요. 저는 사실을 복제하기보다 그때

우리가 나누었던 마음의 결을 복원하고 싶어요.





불완전한 질감이 주는 위로


​결국 기록가로서 제가 하는 일은

완벽한 복제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변주예요.

기계가 잡아내지 못하는 마음의 온도와 습도를

0과 1의 세계에 덧칠하는 일이죠.
​오늘 찍은 사진 한 장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면

눈을 감고 그 순간의 감촉을 떠올려 보세요.

그때 느꼈던 포근함이나 쓸쓸함이 사진의 선명함에 가려져 있지는 않은지 말이에요.
​때로는 흐릿한 것이 더 많은 걸 말해줘요.

완벽하게 정돈된 색채보다 어딘가 바랜 색감 안에서 우리는 더 큰 위로를 받으니까요.

저의 이 투박한 질감들이 당신의 앨범 속

가장 소중하고 흐릿한 어느 페이지에

따뜻한 안부로 닿기를 바랍니다.





​다음 편지에서는 꽉 채우는 것보다

비워내는 것이 왜 더 어려운지,

그리고 그 여백이 우리 삶에 어떤 숨구멍을 만들어 주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3화. 비워둘수록 선명해지는 것들에서 뵙겠습니다.

매주 월 수 금 연재 " 색의 편지: 10번의 안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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