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아무런 상관없던 것들이 삶이 된 적, 당신도 있나요?”
아무 감정도 없던 것들, 스쳐 갔던 이야기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에 가시처럼 박혀 아프게 맴돌았다.
이곳은 나와 무관했던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어느새 그 낯선 세계가 내 삶의 중심이 되어갔다.
중환자실은 조용했다.
숨소리마저 삼켜지는 완전한 적막이었다.
하지만 내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온몸으로 무너지는 소리가 속에서 울렸다.
엄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옆 병상의 환자와 보호자, 건너편 침대를 번갈아 보았다.
안내도, 표지판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길 잃은 강아지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외로움이
등 뒤에서 조용히 나를 덮쳤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중환자실.
공기마저 낯설고, 기계음은 불편하게 귀를 맴돌았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무언가에 기대고 싶었지만,
나를 붙잡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 뒤, 담당 교수님과 간호사 두 분이
조용히 내 앞에 다가왔다.
“폐렴에 의한 급성호흡부전입니다.
현재 항생제를 투여하며 치료 중입니다.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궁금한 점 있으시면 말씀 주세요.”
교수님의 말투는 차분하고 매끄러웠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정중한 병원의 언어. 익숙한 설명, 정제된 어휘.
어쩐지 나와 상관없는 말처럼 들렸다.
그날 이후 매주 월·수·금 오전 11시 30분,
면회는 정확히 반복되었다.
오빠는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왔고,
나는 늘 역으로 마중 나갔다.
오빠와 함께 병원으로 가, 차를 주차하고
엄마가 있는 3층 중환자실로 올라가
출입증에 서명하고, 비닐 가운과 장갑을 챙겼다.
면회 전에는 늘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복도를 걷고, 창밖을 내다보고,
괜히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면회가 시작되면 가운을 여미고 문을 통과했다.
30분의 면회가 끝나면 엄마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우리, 두 밤만 자고 또 만나자.”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어떤 날은 눈을 감고 기도했고,
또 어떤 날은 숨죽여 울었다.
면회가 끝나면 문밖의 아빠와 오빠에게
의사의 말을 간단히 전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무표정한 얼굴 안에 많은 감정이 꼭꼭 숨어 있었다.
면회가 끝나면, 오빠는 아무 말 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일주일에 세 번,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다녀갔다.
말 없는 침묵의 여정이었다.
그건 오빠만의 간병이었다.
“다음 주엔 오지 마.
피곤한데 뭐 하러 왔다 갔다 해. 면회도 안 할 거면서…”
나는 말끝을 흐리며
계단을 오르는 오빠의 등에 대고 중얼거렸다.
면회가 끝날 때마다 아빠와 나는 집 근처 식당에서
콩나물국이나 김치찌개를 먹었다.
말없이 소주잔을 비우는 아빠. 국에 밥을 말아 휘젓는 나.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집에 오면, 나는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고
아빠는 소파에 주저앉아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게 우리의 하루였다. 엄마를 만나는 30분.
그리고 나머지의 긴 공허.
말하지 못한 사랑, 드러내지 않은 불안,
지우지 못한 후회, 놓지 못한 희망이
그 침묵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엄마는 늘 의식이 없었다.
어떤 날은 얼굴이 편안해 보였고,
어떤 날은 손발과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입 안엔 언제나 튜브들이 꽂혀 있었다.
숨을 쉬기 위해, 영양분을 받기 위해,
무엇보다 ‘살아 있기 위해’ 꽂혀 있었다.
엄마의 손목엔 억제대가 묶여 있었다.
무심결에 튜브를 뽑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나는 엄마의 손목에 감긴 억제대를 살며시 풀었다.
두 손으로 그 손을 감싸고,
내 얼굴과 볼, 입술에 조심스레 갖다 댔다.
“엄마, 엄마 딸 왔어. 엄마, 나 여기 있어.”
그 손 하나 붙잡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데,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때.
면회가 끝나갈 무렵, 담당 교수님은 조용히 다가와
늘 조심스럽고 정중한 말을 건넸다.
“호흡 상태는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항생제 반응은 아직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조금씩 호전되는 부분도 있지만, 안심하긴 이릅니다.”
말은 정중했고, 어투는 매끄러웠지만
그 안엔 어떤 확신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마치 내 얘기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설명이 끝난 뒤, 잠시 고요가 흘렀다.
그 고요 속에서 슬픔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빠가 들어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면회는 늘 내 몫이었다.
오빠는 단 한 번도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마음 한쪽을 시리게 했다.
며칠 뒤, 교수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씩 상태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앞, 가만히 서 있던 오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놈의 노인네가 아주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하네.”
그 말에, 우리는 셋 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짧고 가벼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끝에 스친 눈물이 잠시 눈가에 맺혔다.
‘정말 나아지는 걸까.’
‘곧 일반병실로 옮겨질 수 있을까.’
우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다음 면회 날, 교수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간호사가 말했다.
“면회 끝나고, 밖에서 교수님이 뵙자고 하십니다.”
낯선 정적 속에서 우리는 복도에 나란히 섰다.
잠시 후, 하얀 가운의 교수님이 다가왔다.
“자가 호흡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기도 절개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가족분끼리 상의해 보세요.
… 그게 환자에게도, 보호자에게도
좋은 결정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은 안갯속에 떠 있는 조각 같았다.
형체는 보였지만, 그 의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중환자실 문이 열렸다.
누군가의 침대가 아주 천천히 밀려 나왔다.
하지만 그 침대는 일반병실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그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침묵으로의 길이었다.
우리는 복도 끝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 안엔 오직 하나의 바람만이 가득했다.
“이제 일반병실로 옮기겠습니다.”
그 한마디를 나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