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가 가르쳐준 진심

챗GPT는 모르는 '너를 향한 문장'

by 온설


교실은 때로 작은 우주가 됩니다. 그 우주 안에서 아이들은 저마다의 궤도를 그리며 성장하죠.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진행했던 ‘선물용 책갈피 만들기’ 시간은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단순히 종이를 예쁘게 꾸며보라는 과제였을 때, 아이들의 반응은 건조했습니다. 만들기나 꾸미기에 관심없는 아이들에겐 그저 빨리 해치워야 할 숙제, 혹은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작업의 느낌이었죠. 그래서 약간의 목적을 다시 주어야 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 또는 지금 이순간 떠오르는 누군가에게 줄 선물’이라는 목적이 부여되는 순간, 교실의 공기는 단번에 바뀌었습니다. 시큰둥하던 눈빛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어떤 문장을 골라야 그 친구가 기뻐할지 고민하는 아이들의 정수리 위로 보이지 않는 불꽃들이 튀었습니다.



알고리즘이 닿을 수 없는 '서툰 진심'의 무게

오늘날 챗GPT는 단 몇 초 만에 세상에서 가장 유려한 시 구절을 찾아내고, 황금비율에 딱 맞는 완벽한 디자인 도안을 제시합니다. 인공지능은 데이터의 바다를 유영하며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속도로 ‘정답’에 가까운 결과물을 내놓죠. 하지만 챗GPT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그 책갈피를 건네받을 친구의 수줍은 미소를 상상하며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고민의 시간'입니다


서툴게 비뚤어진 글씨 한 줄, 문법이 조금 틀렸을지언정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며 정성껏 골라낸 단어 하나에는 인공지능의 매끄러운 문장이 담지 못하는 ‘존재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정의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가슴 떨려 하며 종이를 고르는 그 맥락적 진실까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과물로서의 문장은 챗GPT가 더 훌륭할지 몰라도, 그 문장이 향하는 '너'라는 존재와 '나'라는 주체 사이의 끈끈한 연결고리는 오직 인간만이 빚어낼 수 있는 예술입니다.



프레네의 인쇄기와 현대의 AI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며 흔히 '기술에 의한 인간 소외'를 걱정합니다. 하지만 교육의 본질은 기술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인간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교육학자 셀레스탱 프레네(Freinet)가 교실에 들여놓았던 '인쇄기'를 떠올려 봅니다. 당시 인쇄기는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알리고 소통하게 만드는, 주체성을 증폭하는 도구였습니다.


지금 우리 손에 쥐어진 인공지능 역시 '현대판 프레네의 인쇄기'가 되어야 합니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생각을 가로채는 대리인이 아닙니다. 기술을 활용해 정보를 얻고 문장을 다듬을 수는 있지만, 그 문장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진심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의 몫입니다. 인공지능과 협력하되 그 주도권을 놓지 않는 법, 그것이야말로 기술의 파도에 잠식당하지 않고 도구를 부리는 ‘다정한 설계자’로 성장하는 비결입니다.



부품이 아닌 주체로 서는 '나다운 설계'

우리가 받는 교육은 흔히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오해받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배움이란 나라는 존재를 가장 나답게 설계해 나가는 고귀한 여정이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모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거꾸로 '효율적이지 않은 과정'에 집중해야 합니다.


완벽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지된 결과물이 아니라, 부단히 흐르고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이 주는 매끄러운 정답 대신, 투박하더라도 내가 직접 선택하고 고민하며 빚어낸 오답이 때로는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합니다. 인공지능과 협력하며 내 주체성을 더 넓은 세계로 뻗어 나가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길입니다.




에필로그: 여전히 살아있는 문장들

책갈피 만들기가 끝나고 교실 바닥에는 색종이 조각들이 뒹굴었지만, 아이들의 손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문장들이 들려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인간답고 존엄한 진실'은 정답의 유려함 속에 있지 않고, 상대를 향해 정성을 다하는 그 투박한 마음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인쇄기에 저마다의 활자를 올립니다. 인공지능보다 속도는 느릴지 모르지만 내가 직접 기획하고 빚어낸 그 문장이 바로 우리가 설계해야 할 삶의 진짜 모습 아닐까요.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속도로 자신만의 삶을 걸어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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