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의 탄생
내가 아이들의 분위기에 이질감을 느낀 건 아마도 둘의 태도 때문이었으리라. 어쩌면 내가 아들의 엄마여서일 수도. 더 늦게 나가고 더 일찍 들어오는 J가, 아들이 귀가해도 인사를 하지 않음이 첫날부터 눈에 들어왔다. 아들도 데면데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출필곡반필면'까지는 아니어도,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반갑게 맞아주고 고된 하루를 위로해 주고 격려도 해줘야 할 것 같은데(순전히 내 기준에) 그러지를 않는다. 각자의 일상이 너무나 바쁘고 힘들어서였을까? 보다 못한 내가, 누군가 집에서 나갈 때는 잘 다녀오라 인사를 나누고 들어오면 반갑게 맞아줘야 하는데 너희는 왜 그러지 않냐고 했다. 그 뒤로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아이들의 인사성이 밝아졌다.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닐 텐데, 나의 쓸데없는 오지랖이 작동하고 말았다.
새벽부터 프로젝트가 있다며 서두르는 아들, 부랴부랴 아침을 챙겨 먹여서 보낸다. 두어 시간 뒤 J까지 학교에 가고 나면 나와 딸은 느지막이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산책을 하기도, 최상의 느림을 실천하며 출산의 시간을 기다린다.
임신 막달에 접어들어 예정일이 다가오는데도 아기는 얼굴 보여 줄 생각이 없나 보다.
산전검사에 동행하니 의사 선생님이 아기는 아주 잘 있다는 말만 한다. 난 산후조리를 조금이라도 더해주고 싶은 마음에 하루라도 빨리 출산을 했으면 하는데 아기가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 산책을 하며 날마다 움직임을 꾸준히 하게 해도 아기가 준비가 덜 되었다면 다 부질없는 노릇이다. 기다리는 수밖에.
기다림이 예정일을 넘기고 유도분만을 하기로 한 날.
오후에 입원이라 다 같이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러 가기로 했다. 텅 빈 영화관에 관객은 우리 넷 뿐. 원어(한국어)로 영화를 볼 수 있다니 신기하기만 한 경험이었다. 여유롭게 영화까지 보고 분만을 위한 입원을 했다.
이곳에서의 모든 절차는 입원한 병실에서 이루어진다. 병실에서 산모는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입원, 분만, 퇴원의 전 과정에서 산모가 충분히 배려받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병원만의 특징인지는 모르겠다.
유도분만을 계획하고 입원했는데 그사이 유도분만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마련되었다. 아기가 나오겠다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자연스럽게 분만과정이 진행되어 다행이다.
모든 고통 중에 으뜸으로 치는 출산의 고통이 도래하지 않았기에, J는 마음을 다잡으며 아직은 여유롭게 준비를 하고 있다. 밤이 다가오고 진통이 서서히 시작되는데도 산모는 고통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는 출산의 순간까지 무통분만 주사제가 투여되어 마지막 힘주기의 순간에도 힘을 주라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아 도리어 고통(?)을 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산모의 고통을 줄이는데 최선을 다하는 의료체계 덕분에 진통이 오는데도 J는 마음 편안하게 잠도 잘자며 밤을 넘겼다. 내심 힘든 과정을 어떻게 견딜지 걱정이 많았는데, 무통의 시간 끝에 아기가 마지막 관문을 나서려 한다며 의료진이 들이닥쳐서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의사가 J에게 아기가 나오려 하니 힘을 주라는데,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없으니(무통주사의 부작용?)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에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온다. 무통의 시간이라고 해서 쉬운 건 하나도 없다. 세상에 무통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 순서의 전후가 있을 뿐.
아기가 나온다며, '사진 찍으라'는 의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촬영을 시작한다. 까만 머리가 보이더니 어느새 다리까지 쑥 나오고 탯줄을 자른다.
오, 이런!
순도 100% 리틀 H다.
이럴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