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은 존재할까, 60년의 술래잡기
한겨울 새벽이었다.
어머니는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있었다.
밤새 바람이 문창살을 흔들던 날이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장독대 위,
꽁꽁 얼어붙은 놋그릇 속 물 위로
이상한 것이 하나 솟아 있었다.
고드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래로 매달린 고드름이 아니었다.
하늘을 향해 꼿꼿이 솟아오른,
투명한 얼음 기둥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달랐다.
그 얼음 앞에 서서
아이처럼 기뻐하며 연신 절을 했다.
“신령님이 응답하셨다.
오냐, 오냐, 하시는구나.”
어머니에게 신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천국도, 극락도 아니었다.
장독대 위,
차가운 공기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
마당 끝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렸다.
그 물을 놋그릇에 담고,
닦고 또 닦고,
장독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을 비비며 기도를 했다.
그 소리는 작았지만,
간절함만큼은 누구보다 컸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수만 개의 신앙이 서로의 진리를 주장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신을 설명한다.
어떤 이는 신을 증명하려 하고,
어떤 이는 부정하려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물을 떠놓고
기다렸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기다림 위로
하늘을 향해 솟은 얼음 하나가 응답했다.
과학으로 설명하자면
그것은 기온과 기압,
물의 팽창이 만들어낸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날 어머니에게
그 역고드름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신이었다.
나는 이제 예순을 넘겼다.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붙들고 살았다.
신은 존재하는가.
그 질문은 나를
차가운 무신론으로 데려가기도 했고,
이름 모를 신전 앞에 서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질문 자체가
어쩌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신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었다.
믿음의 대상이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그 작은 놋그릇 하나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신의 얼굴을 보고 싶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아마도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찾아 헤매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갈증이
신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많은 종교 속에서
길을 잃는다.
숫자를 따지고,
교리를 따지고,
누가 더 옳은지를 논한다.
하지만 정작
신이 머물 자리는
비워두지 못한다.
어머니는 달랐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그저
정화수 한 그릇을 올려놓고
온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것이
그녀의 신앙이었다.
어머니가 떠난 지 오래다.
이제는 아무도
장독대 위에 물을 올려놓지 않는다.
하지만 겨울이 깊어질 때면
나는 문득
그 장면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작은 그릇 하나를 꺼내 본다.
비록 내 눈에는
그날 같은 기적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그릇을 채우는 마음만큼은
어머니를 닮고 싶다.
신은 숫자 속에 있지 않다.
신은 논쟁 속에 있지 않다.
신은
얼어붙은 세상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던 그 작은 얼음처럼,
우리의 지극한 정성이
형태를 얻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그날 어머니의 놋그릇 위에서 보았던
그 맑고 투명한 기둥.
그것이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신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보이지 않는 얼굴을 향해
조용히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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