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발목은 언제나 먼저 젖는다

- 가리려 해도 기어이 젖고 마는 낮은 마음들에 대하여

by 선비천사

현관문을 열자 눅눅한 공기가 허기처럼 달려들었다. 현관 바닥에는 이미 누군가의 발자국에서 옮겨온 흙탕물이 번져 있었다. 구두를 벗자 젖은 양말이 발가락 사이에 들러붙어 기분 나쁜 냉기를 전한다. 면바지 밑단은 빗물을 머금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고, 종아리에는 비릿한 흙내가 배어 있었다. 우산을 챙기는 일에 신경을 썼음에도 기어이 젖고 마는 곳은 언제나 발목 같은 낮은 곳들이다.


젖은 양말을 벗어던지고 욕실 바닥에 발을 디딘다. 찬 타일의 촉감이 종일 팽팽하게 날이 서 있던 신경을 건드린다. 남자로 산다는 건, 어쩌면 젖지 않은 척 연기하며 사는 일일지도 모른다. 밖에서는 유능한 우산이 되어 누군가를 가려주어야 하고, 안으로는 어떤 습기에도 눅눅해지지 않는 건조한 벽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토록 지독한 봄비 앞에서는 그 견고한 연기에도 균열이 생긴다. 가리려 애써도 기어이 젖어버리는 살결이 있다는 사실을, 발목을 적신 차가운 빗물이 증명하고 있었다.


세탁기 속으로 젖은 옷들을 밀어 넣는다.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고요한 집안의 정적을 깬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옷가지들이 서로의 몸을 때리며 뒤섞이는 소리.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베란다 창문을 연다. 건너편 앞산은 이미 비안개에 먹혀 형체만 남았다. 산은 낮은 저기압을 뚫고 무겁게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건 겨우내 얼어붙은 지층 아래서 죽음 같은 적막을 견디며 길러낸 숨이다. 흙의 온기를 기어이 지켜내어 씨앗의 껍질을 터뜨려 본 생명만이 내뱉을 수 있는 비린 호흡. 산이 오래도록 품어온 그 묵직한 숨결이 빗줄기를 타고 내 방안까지 스며든다. 문득 내 안에도 뱉지 못한 채 삭여온 숨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되짚어본다. 사나이의 침묵이 미덕이라 믿으며 삼켰던 말들, 누군가에게 닿지 못하고 가슴 깊은 곳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진심들. 그것들이 이 습기를 핑계 삼아 꽃잎처럼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삶은 흔히 오고 가는 길 위에서 완성된다고들 한다. 사람도, 계절도, 행운도 잠시 머물다 갈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게 어른의 도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연꽃 위의 빗방울처럼 가볍게 떠나가는 법을 모른다. 내 등 뒤엔 털어내지 못한 미련의 진흙이 묻어 있고, 내 눈빛엔 차마 지우지 못한 부끄러움의 화인이 찍혀 있다. 연못에 쌀알을 던져 물고기를 부르듯, 그 비루한 기억 하나를 수면 위로 띄워 올리는 일조차 나에겐 뼈를 깎는 통증이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는 억지로 물기를 말리려 들지 않는다. 빗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고이듯, 내 안의 흩어진 상처들도 이 빗속에서 제 자리를 찾아 둥글게 모일 것이다. 비에 젖어 본 사람만이 햇살의 귀함을 아는 게 아니라, 비에 젖어 본 사람만이 내 몸의 어느 구석이 가장 먼저 차가워지는지를 알게 된다. 나는 그 차가운 지점들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내일 신을 구두의 물기를 닦아낸다.


내일 아침, 나는 다시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를 입고 현관을 나설 것이다. 어쩌면 오늘보다 더 무거운 구두를 신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관없다. 오늘 이 빗속에서 내 몸이 기억한 서늘함과, 산이 뱉어낸 그 비린 숨결이 내 근육 어딘가에 정직한 힘으로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 안개 너머, 서로의 손끝이 닿지 않아도 마음이 이어지는 어떤 소망을 굳이 '무지개'라 부르지 않겠다. 그저 젖은 발목을 닦아내는 이 투박한 손길 속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온기가 스며 있음을 믿을 뿐이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나는 그 빗소리에 맞춰 아주 천천히, 가장 낮은 곳부터 다시 나를 짜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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