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천 원의 광고, 만오천 원의 성실함

by 선비천사

인천의 한 재래시장 입구 신호등 앞에서
나는 처음 그를 보았다.


머리에 커다란 박스를 뒤집어쓴 사람.
몸통까지 내려오는 종이 상자 앞뒤에는
굵은 붉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모네 미용실 커트 6000원”


눈 부분만 둥글게 뚫려 있었다.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개의 작은 구멍 속에서만 세상을 보고 있었다.


요란한 음악도, 확성기도 없었다.
그는 그저 서 있었다.
신호가 바뀌면 천천히 횡단보도 앞을 오가고,
빨간 불이 길어지면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나는 솔직히 속으로 웃었다.


요즘 세상에 저런 방식이라니.
온라인 광고도, 할인 쿠폰도, 화려한 간판도 아닌
박스를 뒤집어쓴 몸 광고라니.


어딘가 촌스럽고,
어딘가 절박해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며칠 뒤, 시장 안쪽 골목에서
그 문장을 다시 보았다.


‘이모네 미용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6천 원짜리 광고는
어떤 머리를 만들어낼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가게 안은 예상과 달리 북적이고 있었다.
손님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했다.


가위를 들고 선 이는 할머니였고,
옆에서 수건을 정리하던 이는 할아버지였다.


나는 그 눈을 알아보았다.
박스에 뚫린 작은 구멍 너머로
보이던 바로 그 눈.


의자에 앉자
할머니는 내 머리를 천천히 만져 보았다.


“커트하고 염색도 하실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속도가 느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옆 의자에서는 다음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급해지지 않았다.


염색약을 바를 때도
꼼꼼히,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약이 묻지 않았는지 살피고,
두피를 손끝으로 눌러 주었다.


그 손길에는

‘빨리 끝내야 한다’는 기색이 없었다.
대신 ‘제대로 해야 한다’는 태도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움직였다.
수건을 건네고,
바닥을 쓸고,
거울을 닦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짧았다.


“이쪽 괜찮아.”
“응, 좋아.”


그 짧은 말속에
수십 년의 시간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문득 신호등 앞 장면을 떠올렸다.


박스를 뒤집어쓴 채
세상 한복판에 서 있던 노인.


그 공격적인 광고는
젊은 감각의 이벤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한 결심에 가까워 보였다.


가게 문을 닫지 않겠다는 의지.
아직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


커트와 염색이 끝났을 때
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정했다.
정성의 흔적이 보였다.


“얼마예요?”


“만오천 원이에요.”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신호등 앞 박스에는 6천 원이 적혀 있었지만,
내가 받은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었다.


나는 만오천 원을 건네며
이 생각을 했다.


이 값은
기술의 값이 아니라
성실함의 값이구나.


요즘 우리는
빠름을 능력이라 말한다.
요령을 센스라 부르고,
화려함을 경쟁력이라 부른다.


성실함은 종종
미련함과 비슷한 자리에 놓인다.


그러나 그 미용실 안에서
나는 다른 풍경을 보았다.


늙은 부부가
천천히, 묵묵히
한 사람의 머리를 다듬는 시간.


그 시간은
유행도, 알고리즘도,
마케팅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게를 나와 다시 신호등 앞에 섰다.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마도 또 다른 머리를 자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세상은 점점 빨라지는데,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속도를 늦춘 채 살아간다.


그리고 그 느린 걸음이
어쩌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붙잡아 주는지도 모른다.


빨간 불이 켜졌다.


사람들이 멈춰 서 있는 동안,
나는 그 박스를 떠올렸다.


기상천외한 광고처럼 보였던 그 장면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소란이 아니라
성실함이 세상을 향해 내민
작은 외침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 아직 사람이 있습니다.”


신호가 바뀌었다.


나는 천천히 길을 건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만오천 원의 무게를 다시 헤아렸다.


그 돈은
머리카락의 값이 아니라,
한 세대가 끝까지 붙들고 있는
성실함의 값이었다.




*같이 보면 좋은 글

입 안에 숨겨 둔 이름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책]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이전 19화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