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봄, 나는 서울역 광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맨발로 아스팔트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두 손바닥을 바닥에 평평하게 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에는 쓰러진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그는 넘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듣고 있었다.
전날 밤 비가 내렸고, 젖은 바닥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묵직한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의 발뒤꿈치는 갈라져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된 상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손바닥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바닥에 밀착해 있었다. 마치 땅의 맥을 짚는 사람처럼.
그날은 3월 초였다.
봄은 눈으로 보기 전에 먼저 움직인다. 꽃이 피기 전에, 달력이 넘어가기 전에, 땅속에서 먼저 뒤척인다. 오래 추위를 겪은 몸은 안다. 아직 차가운 공기 사이로 스며 올라오는 미세한 온기를.
그는 아마 그것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아스팔트 아래, 젖은 흙 아래에서 천천히 풀리는 기척을.
사람들은 그의 곁을 지나갔다.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나 역시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급히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멈추지 못했다는 사실만 또렷하다.
나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곧 부끄러워졌다.
봄은 바쁜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정확히는, 봄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바쁜 사람은 그것이 지나간 뒤에야 알아챈다. “아, 봄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말한다.
그해 나는 늘 어딘가 완전하지 않았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았고,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막연한 불안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움직이느라, 나는 계절을 놓쳤다.
광장에서 돌아온 날, 나는 집 근처 소래산 자락을 따라 오래 걸었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비어 있었다. 겨울빛이 남아 있는 산은 고요했다.
산길 한쪽에서 발을 멈췄다.
바위 옆, 마른 낙엽을 밀어내고 연둣빛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겨우 한 뼘 남짓한 틈이었다. 누가 심은 적도 없는 자리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풀은 거기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한참 그 앞에 서 있었다. 얇은 잎 끝이 바람에 미세하게 떨렸다. 살아 있다는 최소한의 신호처럼.
그 순간 알 것 같았다.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는 것이라는 것을.
지구가 돌아서 생기는 일정표 같은 계절이 아니라, 어둡고 단단한 것 아래에서 기어이 밀어 올리는 힘. 아무도 보장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를 밀어 올리는 움직임. 그것이 봄이다.
그래서 봄은 소란스럽지 않다.
대개는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공원의 벚꽃 아래에는 사람이 많지만, 낙엽 밑에는 사람이 없다. 봄은 오히려 그 틈에서 더 또렷하다.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처마 끝의 빛 한 줄기, 코끝에서 먼저 느껴지는 공기의 결. 그런 곳에서 봄은 먼저 올라온다.
올해도 3월이 왔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멀리 소래산 능선이 보인다. 아직은 겨울빛이 남아 있지만, 그 아래 어디선가는 이미 무엇인가가 풀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창틀에 손을 얹고 잠시 서 있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맨손으로 땅을 짚고 있던 그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아스팔트 아래를 들었고,
나는 산자락 아래를 바라본다.
봄은 눈으로 확인하는 계절이 아니다.
먼저 믿어야 하는 계절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작되었음을 믿는 일.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어 보여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미 방향을 틀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
우리는 꽃이 핀 뒤에야 봄이라 부르지만,
실은 꽃이 피기 훨씬 전부터 봄은 진행 중이다.
마른땅 밑에서, 차가운 줄기 안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다.
나는 이제 안다.
봄은 계절이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태도,
올라오는 것을 믿는 태도,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조급해하지 않는 마음.
소래산 능선이 조금씩 연해질 것이다.
낙엽 아래에서 풀잎이 고개를 들 것이다.
그 변화는 요란하지 않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올해는 또 무엇이
내 안에서 올라오고 있을까.
나는 다만,
그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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