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으로 무심하다 못해 가증스럽다. 내가 교단에서 30년을 사회교사로 군림하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침 튀겨 가며 가르쳤건만, 정작 내가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자마자 시스템은 기다렸다는 듯 광속으로 최적화를 끝내버렸다. 집구석에서는 양말 한 짝 제자리에 두는 인간이 없고, 나라 꼴은 내가 뉴스 보며 혀를 안 차주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잠을 설쳤는데, 정작 내가 퇴직하던 날 학교 정문은 평소보다 더 활기차게 열렸다.
나는 확신했다. 내가 퇴직한 이튿날, 교무실은 초상집 분위기일 것이며, 내가 담당하던 복잡한 행정 업무는 마비되어 교육청에서 긴급 연락이 올 것이라고. “방 선생님, 제발 비번이라도 알려주세요! 선생님 없으니 학교가 안 돌아갑니다!”라는 비명 섞인 전화를 기다리며 스마트폰 배터리를 100% 충전해 두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오는 연락이라고는 ‘[광고] 은퇴 자금 투자 상담’ 문자뿐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잠행’을 나갔다. 마치 퇴위한 상왕이 민정을 살피듯,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학교 근처를 서성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가 없으면 성적이 곤두박질칠 줄 알았던 아이들은 처음 보는 젊은 기간제 교사 옆에서 자지러지게 웃고 있었고, 내 책상은 이미 이름표도 없이 말끔히 치워져 ‘공용 노트북 거치대’로 전락해 있었다. 심지어 내가 10년 넘게 공들여 키워온 교단 옆 난초는 새 주인을 만나 전보다 더 푸릇푸릇한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나라는 거대한 엔진이 빠졌는데, 이 학교라는 기계는 삐걱거리는 소음 한 번 없이 너무나 매끄럽게, 아주 얄미울 정도로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자신을 모른다”거나 “착각과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라고 비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교사인 내가 보기에 이건 명백한 ‘우주의 오류’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지만, 은퇴한 촌부인 나는 이렇게 수정한다. “내가 본다, 고로 우주가 존재한다.” 내가 시장통에서 콩나물 값을 깎으며 흥정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이 우주의 경제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가동되는 것이고, 내가 뉴스 앵커의 멱살을 잡고 싶어질 때 비로소 국제 정세라는 파동이 의미를 갖는 법이다. 만약 내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눈을 감는다면? 대한민국도, 미국도, 저 무심한 학교 난초도 그 즉시 ‘서버 종료’다.
나는 여전히 이 우주의 절대 군주이자, 마음만은 언제나 교단을 호령하던 청년 교사다. 그런데 어제, 이 완벽한 자아에 균열을 내는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함께 탄 젊은 엄마가 돌잡이나 지났을 법한 어린 딸에게 너무나 해맑게 속삭이는 것이 아닌가. “아야,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그 순간, 우주의 중심이었던 나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나 아직 환갑도 안 지났어! 어제까지만 해도 젊은 오빠였단 말이야!’ 하지만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보며,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어, 그래 안녕...”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정말이지 나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이 비효율적인 우주, 게다가 나를 ‘할아버지’로 강제 소환하는 이 가혹한 지구, 수발들기 참으로 피곤해서 못 살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주의 주인인 내가, 이젠 공식적으로 ‘할아버지’가 된 내가 참아야지. 오늘도 내가 인심 써서 눈을 떠주었기에, 저 얄미운 학교와 나를 늙은이로 만든 저 엘리베이터도 오늘 하루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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