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시절이 끝나면
사람은 어디까지 작아질 수 있을까
한때 잘 나가던 배우가
촬영장 한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단 한 줄의 대사를 위해
그는 오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왕년의 이름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듯
그의 등은 낮아져 있었다.
나는 그를 보다가
문득 창밖의 느티나무를 떠올렸다.
저 나무는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제 발로 자리를 옮긴 적이 없다.
씨앗이 떨어진 그 한 뼘의 흙,
그곳이 나무에게는 우주다.
가뭄이 들어도,
칼바람이 가지를 꺾어도
나무는 떠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릴 뿐이다.
사람들은 그 부동을 안쓰러워하지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그곳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배우는
바닥 위에 서 있었지만
그 발밑은
과거의 영광과
지금의 빈곤이 뒤엉킨
척박한 기억의 땅이었다.
인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는, 떠나지 못한 것들 위에 서 있다
우리는 각자의 터전에
깊이 묶여 살아간다.
그 터전은
기억이다.
성취와 실패,
사랑과 단절,
차마 꺼내지 못한 상처들까지
그 모든 것이 쌓여
한 사람의 땅이 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서 있는 땅의 결을
가만히 짚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굳어버린 흙을
억지로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고여 있던 것들이
천천히 스며 나오게
기다리는 일.
기억은 흙과 같아서
어떤 손으로 만지느냐에 따라
다른 결을 만든다.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자리 역시
비옥하거나
혹은 척박할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내가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땅이다.
다시 창밖의 나무를 본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그 나무를 붙들고 있다.
우리 또한
각자의 기억 속에
뿌리를 내린 채
간신히 서 있다.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가
오늘의 나를
겨우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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