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깃한 마음 하나가, 오늘의 나를 견디게 했다

by 선비천사

사람은 뉴스를 들을 때보다 한 장면을 볼 때 더 오래 멈춘다


이어폰 너머의 소식은 참혹했다. 미사일이 지나간 자리와 숫자로만 남은 죽음들. 건조한 앵커의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차갑게 흘러들었다. 세상은 거대한 맷돌 같았다. 그 중심에서 인류라는 곡물들이 비정하게 갈려 나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소음을 차단막 삼아 벚꽃이 분분한 골목길 속으로 스며들었다.


꽃이 지고 있었다. 가장 찬란한 순간에 제 몸을 놓아버리는 꽃잎들. 그 유영은 우아해서 오히려 잔인했다. 그 풍경 속을 걷던 내 시선이 낡은 아파트 입구에서 멈췄다. 그곳엔 한 생의 무게가 놓여 있었다.


굽은 등이 손수레의 휘어진 손잡이를 닮은 할머니였다. 수레 위엔 납작하게 눌린 종이상자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바퀴가 구를 때마다 쇳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할머니의 손가락 마디는 옹이 진 나무처럼 불거져 있었다. 그 위로 꽃잎 하나가 잠시 머물다 떨어졌다.


그때 뒤따르던 아주머니가 할머니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주머니의 외투 소매 끝단도 할머니의 수레처럼 해져 있었다. 아주머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앞치마 깊숙한 곳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지폐 몇 장을 꺼냈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했을 땀의 결정체였다.


아주머니는 사양하는 할머니의 거친 손바닥을 억지로 펴고 그 안에 종이 뭉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주먹을 꼭 감싸 쥐었다. 새어 나가는 온기를 가두려는 듯한 단호한 손짓이었다. 할머니의 항변이 잦아들었다. 아주머니는 짧은 목례를 남기고 서둘러 아파트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찰나의 침묵 속에서 전쟁의 뉴스를 잊었다. 귓가에 머물던 포성은 사라지고, 타인의 고단함을 알아챈 자의 낮은 숨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지폐를 쥔 할머니의 어깨 위로 벚꽃비가 쏟아졌다. 아마 그런 것들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거대한 비극을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자기 안의 가장 남루한 구석을 털어 타인의 빈 손바닥을 메워주는 그 꼬릿 한 마음들. 아주머니가 건넨 것은 당신의 생에서 떼어낸 작고 따뜻한 틈이었다. 그 틈 사이로 꽃잎이 내려앉고, 얼어붙었던 골목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이어폰을 빼 주머니에 넣었다. 기계적인 소음이 사라진 자리로 비로소 생의 소리들이 밀려왔다. 보도블록 틈새를 메우는 꽃잎들,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느 집 창문에서 번져 나오는 된장찌개 냄새.


주머니 속의 차가운 손을 만져보았다. 부끄러움은 언제나 늦게 찾아오고, 온기는 예고 없이 당도한다. 할머니가 다시 수레를 밀기 시작했다. 바퀴 소리는 여전히 삐걱거렸지만 아까처럼 비명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벚꽃은 지고 있었으나, 바닥에 닿은 꽃잎들은 비루한 아스팔트 위를 환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무너지고 있었으나, 어느 이름 모를 골목에서는 이토록 고요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그 꼬릿 한 온도가, 오늘의 나를 견디게 했다.



*같이 보면 좋은 글

전원 나간 베짱이, 이대로 멈춰도 괜찮을까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책]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이전 20화우주의 중심이던 나, 엘리베이터에서 퇴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