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다정함에 대하여

by 선비천사

현관문을 연다. 복도의 정적은 늘 낯설고도 달콤하다. 수십 년간 넥타이를 조이며 전장으로 향하던 그 문이다. 이제 그 너머에는 수백 명의 눈동자도, 빽빽한 출석부도 없다. 그저 낡은 슬리퍼를 끄는 노년의 사내 하나를 무심히 삼켜주는 아파트 단지의 건조한 소음뿐이다.


정문을 나서자마자 익숙한 기계음이 들린다. 노란색 요구르트 카트다. 아주머니는 냉장고 칸을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나는 곁을 지나며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아주머니 역시 나를 보았겠지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동선 안에 존재하되, 서로의 생애를 침범하지 않는다.


과거의 나는 '사회 교사'라는 직함 아래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 숙명인 줄 알았다.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하면 무관심한 스승이라 자책했고, 상담 주간이면 그들의 내밀한 가정사까지 파헤쳐 기록했다. 이름표를 달고 사는 삶은 피곤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무게를 내 어깨에 나누어 짊어지겠다는 무언의 계약이었으니까.


경비실 유리창 안쪽, 경비원 아저씨가 신문을 넘긴다. 지난주, 누군가 내 이름을 아는 척하며 다가왔던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혹시 00 고등학교 계셨던...?" 찰나의 침묵. 나는 잘못 보셨다며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내 과거를 들추는 순간, 이 평화로운 익명의 성벽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낯선 이의 반가운 인사가 내게는 침입처럼 느껴졌다. 나는 타인에게 '기억되는 존재'이길 거부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나를 얻는다.


세탁소의 뜨거운 증기가 안경을 뿌옇게 흐린다. "찾으러 오셨어요?" 아가씨가 영수증 뭉치를 뒤적이며 묻는다. 그녀는 내 옷의 치수와 소매의 얼룩은 기억하겠지만, 내가 어떤 책을 읽으며 밤을 지새우는지 묻지 않는다.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도 마찬가지다. 형광등 아래 무표정한 그는 바코드를 찍으며 나를 '보편적인 개체'로 처리한다. 이 지독하게 차가운 무관심이, 평생을 타인의 시선 속에서 교정당해야 했던 내 영혼에는 가장 포근한 솜이불이다.


우리는 흔히 고독을 병이라 부르지만, 익명성은 가장 고결한 자유의 형태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 내 슬픔이 구경거리가 되지 않고, 내 기쁨이 시기의 대상이 되지 않는 거리. 이곳에서 나는 투명해진다. 투명해진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풍경과 비로소 하나가 되어 흐른다는 뜻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입구의 요구르트 카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경비실의 신문 넘기는 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궁금해하지 않고, 나 또한 그들의 저녁 식탁을 상상하지 않는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는다. 다시 완벽한 정적이다. 나는 신발을 벗으며, 방금 스쳐 지나온 그 무심한 얼굴들을 떠올린다. 성(姓)도 이름도 모르는 그들이 지켜준 나의 하루. 창밖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고, 이름 없는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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