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아닙니다, 직장인 맞습니다.

특명: 키다리아저씨 펀드, 재능을 꽃피워라!

by 밤결


"오천만 원만 주세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난데없는 요청에도 그들은 흔쾌히 오천만 원을 내어주었다.


직장인들의 고민이 모여 한 아이의 재능이 꽃을 피웠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던 어느 날, 특명이 내려왔다.


지역 오케스트라 에이스 소녀의 재능을 키워주라는 얘기였다. 이름도 생소한 바순(Bassoon)이라는 악기를 다루는 학생이었다.


오케스트라 단장의 간곡한 요청이 기관에 닿았다.

그 간곡한 요청의 대가는 '오천만 원'이었다.


오천만 원의 펀드를 조성해 재능 있는 학생들의 '키다리아저씨'가 되어주는 프로젝트였다.


"바순이 비싼 건 수천만 원이 기본이에요. 이 아이 진짜 재능 있어요.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적어도 이 정도 악기는 써야 해요. 레슨도 필수예요"



오케스트라 단장이 추천 악기를 보여줬다. 첫자리에 4가 보이고 뒤에 따라붙는 0이 하나, 둘, 셋.... 여섯 개였다.


... 일단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오케스트라 단장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뒤돌아선 등짝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일단 고민해 보겠습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 팀장님.....? 오.천.만. 원 맞죠? 오천 원 아니죠? 아까 그 바순이라는 거... 사백만 원... 맞죠?"


"... 응.... 일단 짐 챙기자. 생즉사, 사즉생의 정신으로 간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잘 안 눌러졌다.

오천만 원의 무게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직장인 일 년 치 연봉을 당장 만들어 오라니.


사회복지사의 업무 범위에는

'후원'과 '모금'이 분명히 존재했다.


겨울철 사랑의 냄비를 생각해 보시라.


하지만 시커먼 아저씨 둘이서,

한 여름 땡볕에 냄비 들고 종을 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폭염에 거리에 사람도 없는데.


직장에 정기후원을 해주는 업체가 몇 군데 있긴 했다.

하지만 예정에 없던 오천만 원 이라니...

햇빛에 정신이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쨌든 방법은

해당 업체들의 문을 두드려보는 수밖에 없다.


"가자! 오천만 원 땡겨보자!"





잠시 후 한 쇼핑몰에 도착했다.

친구와 가족과 수십 번은 왔던 곳.

심지어 어제도 밥 먹으러 왔던 곳.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서로에게 의지해 간신히 옮겼다.

더위에 발이 붙어버렸나 보다.


"팀장님. 앞장 서시죠."


티격태격하던 도중 사무실 문이 열렸다.


"어...? 주무관님, 오신다더니 소식이 없으셔서 나와봤어요. 왜 안 들어오시고 밖에 계세요. 날도 더운데 얼른 들어오세요"





어버버 하는 사이 미팅룸에 마주 보고 앉은 우리.

시원한 에어컨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렵게 운을 띄웠다.


"저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어려운 부탁을 드리러 찾아뵈었어요"


"사실 저도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요..."


말하기 전부터 덜컥 겁이 났다.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죄송하다니.

무슨 일일까. 선공을 양보했다.


"사실 저희가 매년 후원하던 김장 한마당 행사를 올해는 못 할 것 같아서요. 아시다시피 코로나가 끝날 기미가 안 보여서요. 그래서 말인데... 번거로우시겠지만 혹시 김장행사 말고, 후원금으로 의미 있는 사업 하나 만들어주십사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순간 팀장의 눈이 빛났다.


"아유 죄송하기는요! 항상 도와주셔서 얼마나 감사한데요"


"저희야 회사에서 사회환원사업 일환으로 홍보 겸 진행하는 건데요. 저도 담당 직원일 뿐이고. 새로 일하나 드려 죄송할 뿐입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직장인의 공감대를 무기 삼아 간절함을 장착했다. 그리고 짐짓 비장한 말투로 말했다.


"사실은 저희가 지금 코로나 시대에 맞는 찾아가는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데요, 거기 에이스 소녀가 지금 도움이 필요해요. 재능 있는 학생들을 후원하는 '키다리아저씨' 펀드를 만들고 싶습니다. 오천만 원이 필요합니다!"


오천만 원의 거대한 미로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저 반대편에서

같은 편의 직장인도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로... 까지는 아니고,

직장인은 과제가 주어질 때 그저 시도할 뿐.


그렇게 막막했던 직장인 셋과

학생을 도와주고자 했던 단장의 고민이 모여

하나의 재능이 꽃을 피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