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지켜보겠다고 그러는데, 무섭더라구

by 서재진

10월 초 L.A. 총각을 소개해 준 은정이가 L.A. 에 볼일이 있어 가는데, L.A. 총각에게 직접 전해줄 터이니, 카드와 선물을 준비하라고 나에게 권고했다. 마침 그때 즐겨 듣던 목사님께서 하신 설교가 ‘자매들이여, 제발 형제들에게 선물을 주지 마라’였다. 그럴 돈이 있으면 주변 식구들에게 먼저 베풀라고 하신 말씀이 귓가를 맴돌아 그리 하지 않겠노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은정이가 하는 말이,


“언니, 생판 모르는 남한테도 이렇게는 안 해요. 촌스럽게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소개한 저를 잘 모르시겠다고 하니, 저도 인사드리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지요. 부담 안 가는 작은 정성의 표시라고 생각하시고 준비해 주세요.”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2001년도 12월부터 그다음 해 봄이 오기 전까지, 몇 달 동안 한국에 있는 낯선 분과 이메일을 한 적이 있었다. 코넬 유학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분이었는데, 순진한 나는 한번 만나본 적도 없는 분과 이메일 하면서 기대와 상상이 부풀어져 급기야는 그 분과 결혼하는 줄 알고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연락하다가, 결국 한번 뵙지도 못하고 씁쓸하게 끝난 아픈 상처가 있었다.


한국 다음으로 먼 거리가, 미국 동부에서는 서부 아니겠는가? 지금은 좋아서 밤잠을 설치며 연락을 하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것이기에 기대를 내려놓고, 주어진 상황을 감사하며 현재를 누리고자 많이 애를 쓰던 찰나에, 은정이 제안은 참 근사해 보였다.


학교 물품을 파는 곳에 가서, 곰 인형과 카드를 사서 정성 들여 글을 써 내려갔다.


카드 속엔 축복을 담은 말과 더불어, 우리가 만날 수도 있고, 설혹 한 번도 못 만나고 끝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싸이월드 일촌이니, 어느 누가 일촌을 먼저 끊지 않는 이상, 하나님께서 형제님을 들어 어떻게 좋은 가장으로, 좋은 목자로, 좋은 평신도 사역자로 쓰시는지 죽을 때까지 지켜보겠노라고 담담하게 써 내려갔다.


카드를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우리가 전화로 목소리를 듣기로 한 콜럼버스 바로 전 주일 오후였다. L.A. 총각은 콜럼버스 날 덜덜덜 떨면서 나와 전화 통화를 하고, 그날 오후 L.A. 에서 내가 머물고 있는 북동부 뉴욕 주 이타카라는 곳까지 날아올 비행기를 끊었다고 했다. 이타카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락체스터라는 곳에 친동생 내외가 살고 있어, 어머님 모시고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내겠다는 명목으로 날아오면서, 겸사겸사 나도 만나보고 가겠다고 했다.


결혼 후, 내가 물었다.


“일주일 휴가까지 내면서 대단한 결심을 했네? 내 편지가 그렇게 심금을 울렸나? 어느 부분에서 이 사람을 꼭 만나야겠구나 싶었어?”


그랬더니,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남편이 하는 말,


“죽을 때까지 지켜보겠다고 그러는데, 무섭더라고...”


하루는 L.A. 형제 손 끝에 힘을 주시사 형제로 하여금 먼저 고백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새벽에 드리고 나서, MSN 메신저로 채팅을 할 때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직 만나본 적도 없는 형제인데, 오늘은 얼굴에 철판을 넉넉히 깔고 내 자랑을 실컷 하고 싶어졌다.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저, 한국에서 고등학교 들어갈 때 전국적으로 시험을 보는데 200점 만점에 저는 188개 받았어요. 못하는 점수 아니죠, 호호호! 저는 안양이라는 비평준화 지역에서 여고에서는 가장 커트라인이 높은 명문 안양여고를 나왔고요, 호호호!”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현장감을 부여하고자, 메신저 창을 흔드는 기능으로 채팅 창을 몇 번 들었다 놨다 했다.


스스로를 기계치라 하는 L.A. 총각은 으흐흐흐~ 웃으면서, 매번 내가 새 기능을 시도하면 항상 '나도 같은 거~'하고 메시지를 입력하곤 했었다.


그랬더니, ‘서승훈 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대기 중...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대기 중...’이라는 메시지가 보였다.


뭔가 망설이고 있는 듯한 L.A. 총각에게 말보다 더 빠른 타이핑 실력으로 연실 말을 이어갔다.


“저, 잘했다고 쓰시려고 그러시죠? 네, 저도 다 알아요. 무슨 말씀하고 싶으신지~”


하면서 말을 하는 와중에, 한 마디가 올라왔다.


“사실, 나는...”


“네, 나는 뭐요?”


다시 ‘대기 중’이라는 신호와 더불어 망설이기를 수십 번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으음... 194개 맞았어...”


순간,


'아차! 이분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민 가셨다고 했지! 아뿔싸, 헛다리 짚었네!'


싶었지만, 타고난 립서비스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머어머, 어머나! 정말 멋지세요! 훈남이 신줄만 알았는데, 게다니 똑똑하시기까지! 그럼요, 가장이 똑똑해야 집안이 두루두루 평안하고, 가정과 사회가 바로 설 수 있지요! 훌륭하세요, 정말! 이민 1.5세대를 짊어지고 가실 차세대 주역이시군요! 그런 분과 채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광입니다. 불라 불라 불라...”


끊임없이 타이핑을 치며 L.A. 총각을 비행기 태워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진지모드로 말을 하신다.


“사실...”


“네, 사실 뭐요?”


“네가 내 배우자 이상형이야”


나는 머리털 나고 나보고 이상형이라고 하는 소리를 처음 들어본지라 순간 당황했다. 오늘 새벽에 드린 기도의 응답이 이리도 빨리 올 줄이야. 그래도, 난 여자인데, 그 고백에 덥석 ‘저도 그래요’ 할 수는 없었다. 뭔가 우아하면서 다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독교적인 고상한 멘트를 생각해 냈다.


“어머어머... 제게도 기도할 시간이 필요해요. 기도할 시간을 주세요. 내일 기도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다음 날인 2006년 10월 19일 동부 시간으로는 새벽 2시 57분에, 서부 시간으로는 10월 18일 밤 11시 57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싸이월드 미니홈피 비밀이야 방명록에 남겨져 있었다.


“잠 잘 잤어? 어제 많이 피곤했었지. 그래서 내가 전화 안 했어. 너 푹 자게. 오늘은 상큼한 컨디션으로 새벽을 맞이하고 은혜 많이 받길. 난 재진이가 새벽 기도할 때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테니 항상 기도해 줘. 너의 기도에 요즘 큰 힘을 얻는다.


그리고 나도 배우자 기도할 때 처음에는 내가 바라는 배우자상으로 구하는 기도를 많이 했었는데 몇 달 전부터 나 자신이 나의 배우자에게 최상의 배우자로 잘 준비될 수 있도록 기도를 바꾸었어. 근데 나의 모습을 그대로 좋아해 주는 너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 난 항상 나의 부족한 면을 메워 줄 수 있는 활기 있고 명랑하고 긍정적이고 말을 잘하는 믿음의 여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어. 그리고 똑똑하고 지혜롭고 상황 판단을 잘하는 현숙한 여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그리고 평신도로 함께 하나님의 일을 기쁘게 하는 비전을 가진 여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나를 세워주고 격려해 주는 그리고 요리도 이왕 잘하는 여성스러운 자매님을 구하고 기도했었는데 (배우자 기도는 4년여 한 것 같아) 이렇게 정확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셔서 이러한 모든 것에 맞는 너를 만나게 해 주셔서 너무 행복해.


나도 글이 참 길어졌어. 너랑 비슷해지려고 하나 봐. 빨리 한 달이 지나갔으면 좋겠어. 그래서 너랑 만나서 함께 즐겁고 기쁜 시간을 보내게.


오늘 밤은 나도 좀 피곤하네. 목자 모임 후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이렇게 길게 써본다. 그리고 너는 나를 나 이상으로 많이 아는 것 같아. 너무 눈썰미와 눈치가 빠른 것 같아. 사실 나 눈치 되게 없거든. 네가 나의 부족한 면을 메워줄 것이고 나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죽기까지 사랑한 것 같이 나도 너를 그렇게 사랑하고파.


그럼 목요일 주의 은혜가운데 열심히 공부해”


추신:L.A. 출장 중인 남편의 허락을 받고 2002년 6월 1일부터 벽에 붙여놓고 기도했던 서승훈 배우자 기도제목을 함께 올립니다!



마흔즈음에 여섯.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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