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요, 성우 뺨 칠 정도로 목소리가 예뻐요

by 서재진

L.A. 총각과 다정하게 싸이월드 미니홈피 비밀이야 방명록으로 연락 하던 중, 하루는 목소리가 궁금했다. 주변 동생들 조언에 따르면, 글로 서로 교제하는 것과 목소리 들으며 전화 통화하는 것은 천지차이라며 형제가 먼저 전화 했어야 한다고 그런다.


그러고 보니, 이 형제가 내게 전화 한 적도 없고, 전화번호 물어본 적도 없었다. 연애의 고수인 동생들에게 여자 쪽에서 너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우아하고 고상하게 상대편이 먼저 전화 하도록 어떻게 유도해야 하는 지 물었다. 동생들이, ‘저, 목소리 정말 예뻐요.’라고 말하란다.


그래서, 방명록에


“저는요, 성우 뺨 칠 정도로 목소리가 정말 이뻐요. 웅변을 해서, 발음도 정확하고요, 말은 글보다 더 재미있게 잘해요. 동전을 넣지 않아도 계속 돌아가는 공짜 토크박스죠!”


그랬더니, 그러시냐고, 그렇게 보이신다고 했다.


동생들에게 다시 물었다, 거의 무반응이라고 이다음 단계는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자연스럽게 프로필에 언니 전화번호를 기입해 놓고, 제 전화번호 프로필에 있는 거 아시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메신저로 채팅 하는데, 이 전화번호 맞지요? 하면서 내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나는 아, 형제님 전화번호는 이건가요? 했더니 맞는다고 그러신다. 그래도 전화는 안 하신다.


동생들 말로는 필시, 이 형제분은 우리의 교제를 나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눈치코치가 2% 부족해 보이는 L.A. 총각에게 조금은 서운한 내 심정을 내 비췄다.


그랬더니, 시차가 3시간 나는 동부와 서부에 있는 것을 고려해 서로가 통화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정해놓고 L.A. 총각이 먼저 전화 걸기로 했다.


2006년 10월 9일 콜럼버스데이 서부 시간으로 오전 10시, 동부 시간으로는 오후 1시에 드디어 전화가 왔다.


익히 다 알고 있는데, 처음 소개받아 통성명하는 양 누구시냐고 운을 띄운 뒤 어색함에 못 이겨 서로 후들후들 떨면서 몇 마디 못하고, 4분 만에 통화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내가 수줍어하며, 목소리가 부드럽다고 한껏 띄워주니까, 자칭 72년생 훈남이라고 하신다. 본인의 이름 승훈 중 마지막 ‘훈’이 훈훈할 훈(薰) 자라고 진지하게 힘주어 말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나는 내 특유의 고음으로 크게 너털웃음을 지었고. 그날 오후 방명록 비밀이야에 전화 상으로 떨려서 못한 말들은 단편 소설 수준으로 길게 써 내려갔다.


소개받고 한 달 남짓 만에 드디어 목소리를 들었구나!


그날부터 기도 제목은 ‘이 형제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서로 채팅할 때 이 형제 손끝에 힘을 주시사 형제가 먼저 제게 고백하게 해 주세요!'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아무리 내 성격이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라 할지라도, 난 명색이 여자 아닌가!


추신: 사진은 2005년 가을 개인적인 볼일 차 잠시 들렀던 Cornell Campus 중 제가 집과 실험실 사이를 오가며 산책을 즐겼던 Beebe Lake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마흔 즈음에 5.jpg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04화난, 감자에 소금 찍어서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