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도움은 안 받을 거라 다짐했건만

2002년 2월 26일

by 서재진

이곳에 오기 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차가 없으면 두 다리 멀쩡하니 걸으면 되고 너무 멀면 불편하더라도 시간을 맞춰서 버스를 이용하면 되고.


요리는 시간이 걸리니까 간단하게 사 먹으면 되고, 저절로 다이어트도 되고 일석이조요, 영양실조에 걸리겠다 싶으면 내 한국에서 공인된 영양사니 나를 위해 영양식단을 짜서 마이너스가 되어버린 체력을 플러스로 바꿔놓으면 되고.

절대 도움은 안 받을 거다. 속으로 결심에 결심을 하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래서 굳이 공항에 도착해서도 pick up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요, 난 사막에 내버려져도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런데, 먹을 것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냉장고에 물도 떨어졌습니다. 칼로리 따지면서 살찐다고 비상식량도 거의 안 샀습니다. 시리얼을 사두긴 했지만 이제껏 우유도 제대로 고를 줄을 몰라 애를 먹었습니다. 커피에 타는 heavy cream을 시리얼에 부어먹고 심하게 체했습니다. 건강에 자신하며 한국에서 소화제 한 알 챙겨 오지도 않았는데. 그다음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산 우유가 커피에 넣는 크림 half and half였습니다.

그래서 이 크림에 맞춰 커피와 설탕을 샀습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제 몸이 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현기증도 나고, 식은땀도 나고 쉬 피곤하고. 그래서 혼자서 장보러 가려고 마음만 먹고 있었습니다.

살 품목을 적어보니 노트 한 바닥이 되어버렸습니다. 갖고 오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 엄두도 못 내고 있었습니다. 조금씩 여러 번 갔다 와야지 그렇게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환 선배님이 수업 끝나고 수퍼마켓 웨그만에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물건을 다 사고 보니 제 것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정작 선배님은 도넛 몇 개. 집 근처에서 사도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쇼핑은 저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외국얘들을 이기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하면서. 구수한 된장 찌개에 가지나물 깻잎 무엇보다 따뜻한 밥.

너무 감사해서 와락 눈물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저의 오만한 자신감에 금이 가면서 말입니다.


지금은 이곳에서의 삶이 빈약해서 제가 머리를 숙이고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많겠지만 저도 곧 머지않아 선배님 가정처럼 다른 신참내기들을 도와줄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2002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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