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22일
나는 TV 가 없다. TV가 없는 사람이 비디오가 있을 리 만무하다. 중고 TV 나 비디오 살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돈이 아까워서, TV 살 그 돈이 정말 아까워서 사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TV 사느니 차라리 먹고 싶은 거 하나 더 사 먹는 게 훨씬 더 낫지~한다.
한국에서도 TV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볼까 말까 했다. 구정 때나, 추석 때 시골집에 잠시 내려갔다가 할 일이 없으면 발가락을 움직여서 TV, 비디오 리모컨을 작동하며 추억의 영화시리즈 한편이나 제대로 볼까?
그래도, 미국에서 영어 배우려면 TV정도는 있어야지, 무슨 소리! 주변에서 하도 이렇게 많이 얘기하길래 나도 내심 걱정했었다.
"맞아, 영어 listening을 위해서라고 TV는 한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뉴스도 보고, 시티콤 같은 것도 보고 말이지... 아, 근데 생각을 해봐!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서서 꼭두새벽으로 막 바뀌려고 하는 자정에 겨우 지친 몸 질질 끌고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잠을 더 자고 말지 TV를 볼 새나 있겠어? 아무래도, 지도교수님께 여쭤봐야겠다. TV를 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나의 향상되어야만 하는 영어를 위하여~ 위하야~! "
지도교수님 방 문이 열려 있길래, 빼꼼히 인사하고 들어가 질문이 있는데요... 하면서, 나의 이 구닥따리 같은 영어발음 향상과 어휘력 증진을 위해서 TV를 사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내처 이렇게 TV 안 보고 사는 게 더 나을까요? 하고 여쭤봤다. 미국인이시고 나같이 영어발음 엄청 구진! 동양아이를 거둬주신 분이시니까, 영어공부한다면 더 솔직하고 학자적인 답변을 해주시겠지... 하고 기대하며 교수님 입술을 주시했다. 뭐라, 말씀하시나...
"내 생각에 TV 봐서 영어가 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시며 큰 안경 너머로 나랑 눈을 마주치시고 씽끗~ 웃어주셨다. 나는 그럼, 어떻게 해야 영어가 늘지요? 하는 그윽한 미소가 담긴 눈빛으로 교수님 미소에 화답하였다. 교수님께서 이내 말을 이어가셨다.
"그리고 나도 우리 집에 TV 없다. 영어 늘고 싶으면 영어로 된 거 많이 소리 내서 읽고, 발음 이상하다 싶으면 나한테 오너라, 내가 발음 가르쳐 줄게~"
하셨다. 그날 이후, 드디어 영어문제에 대한 확답을 얻었다는 당찬 신념하에 내가 TV 없는 이유, TV 안보는 나 자신에게 더 자신만만해졌다.
TV 안보는 사람이 영화는 어떨까? 이것 역시도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다. 4년가량이 되는 미국 생활에서, 정말 유학생활의 우울감이 극에 달 했을 때 내 노트북 들고 무선 인터넷이 되는 도서관에 가서 두 편의 한국 드라마를 봤다. 하나는 나랑 비슷하게 생긴 송혜교~ )가 나오는 가을동화이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배용준! 님이 나오는 겨울연가였다. 무선 인터넷이 되는 도서관에서 문 열자마자 들어가 무선이 가장 잘 잡히는 도서관 정중앙 로비에 멍석을 깔고 가을동화를 봤다. 눈물 많은 내가 슬픈 가을동화를 보면서 정말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모른다. 도서관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나를 보시면서 아마 이렇게 생각하셨을 거다.
"저 조그만 동양아이는 고국이 그리워, 아니 가족이 그리워 저렇게 서럽게 우나... 아님, 우리가 모 잘못한겨? "
하시는 눈치다. 그래도 꿋꿋하게 마지막 편까지 다 봤다. 가을동화 드라마 보면서 실컷 울고 나니까 카타르시스 작용이 일어났던지 그제야 곤두박질친 성적에 대한 슬픔이 좀 누그러지더군!
TV도 안 보는 사람이 뉴스는? 원래 안 봤었다. 볼 여유가 없었다고 말하면 시대를 외면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거룩한 핑계라고 할까? 한국인터넷으로 뉴스 보는 법이 있다고 머리로는 알았는데 가슴으로는 그렇게 하면 공부 때려치우고 물론 유학도 실패하고 당장 한국 가는 줄 알았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님이 돌아가신 것도 돌아가신 지 6개월 뒤에서나 알았다.
나의 맹꽁이 유학생활이 정말 심각했던 적이 있다. 몇 해 전인가 9월 11일 뉴욕사태가 터진 날이었다. 나는 오피스에서 있다가 수업을 들으려고 다른 건물로 향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거리로 다 나와서 핸드폰을 들고 전화통화하느라 정신이 없는 거라~ 그래서,
'아그덜이 왜 공부 안 하고 딴짓하나?'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상하다 하면서 수업이 있는 건물로 갔는데, 테러사태 때문에 수업이 휴강되었다고 했다. 다들 옹기종기 과건물마다 긴급하게 배치된 TV를 보며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 때, 나는 모처럼 여유가 생겼다고 좋아하며 내 오피스 가서 잠을 잤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한국에 있는 언니랑 전화통화하다가 거의 혼비백산되어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나는 로켓인지 비행기인지 공격한 World Trade Center의 가운데 층만 무너진 줄 알고 있었는데, 전화통화하는 언니가 내게 그랬는데 전체가 다 무너졌다는 거다. 정말이야? 너무 놀래서 목소리도 안 나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다른 건물도 함께 또 무너졌다고 했다. 더 기절하는 줄 알았다. 부시가, 이번 뉴욕 테러사건으로 인해 무척 화가 나서 이라크한테 전쟁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오버하는 줄 알았다.
'에고, 아찌~ 한층 겨우 날아간 것 같고 몰 그리 오버하시나요... 진정하시와여~'
했는데, 이거 사태가 무척 심각했던 모양이구나~ 하며 올매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그날 저녁 언니랑 전화통화하고 너무 놀래서 놀란 가슴을 진정기 키기 위해 귀가시간을 일찍 앞당겨 집에 가서 몸져누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방 이불 위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그리고 한 달 뒤 또 한국에 있는 언니랑 전화통화하면서 언니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야, 미국에 지금 탄저균 가루가 나 돈다~ 모, 너 같은 가난한 외국인학생한테 그런 게 날아갈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수신인 송신인 등이 불확실한 소포나 편지는 절대! 뚜껑 열어보지 말아야~한다, 알겠지? 엉? "
"언니, 근데. 탄저균이 뭔데? 그게 왜? 무슨 일 있었어?"
언니 약간 화가 나서 뚜껑이 열린듯한 과격한 목소리로 태평양 건너에서 전화받고 있는 동생한테 소리 질렀다.
"야! 동생~ 너, 미국에 있는 거 맞아? 옆집 지하실에 숨어있으면서 미국에 있다고 거짓말하는 거 아녀? "
했다. 시대를 모르고 사는 나의 심각한 맹꽁이~! 습성을 깨닫고 나서부터, 지금은 따로 시간을 내서라도 사명감을 갖고 뉴스를 읽는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 지구 정반대 편 내 조국에서 일어난 일 등등 되도록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두루두루 알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이렇게, 깜깜해서 공부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전공하는 것이 사회학이나, 경제학, 정치학이 아니더라도 시대를 따라 나의 머리를 업데이트시켜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시대 흐름을 몸에 익혀서 그 흐름에 나를 맡기고 그 흐름의 강도와 파도의 세기를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몸으로 익혀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요새 참 많이 한다.
유학을 나오면 별시간이 다 아깝다. 정말 정신없이 이 집 저 집 드나들며 인터넷으로 딴짓을 엄청 많이 하면서도, 막상 정기적으로 크게 떼어놓아야 할 시간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망설여지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구차하게 내거는 변명은
'내가 여기 왜 왔는데~! 공부하러 왔지~ 이거 하러 왔어?'
이다. 이 증세가 심해지면, 한국에서 교회 열심히 다니던 학생들도 주일을 무시해 가며 공부하기 일쑤이고. 월요일 시험이 있는 사람이면, 토요일 정기 구역모임과 성경공부 건너뛰기도 일쑤다.
공부라는 대의명분 앞에 너무 나도 나약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매주 코가 꿰서 질질 끌려가는 청년부 모임도 난 내가 가야 한다는 사실과, 나 청년부 찬양인도해야 해~ 하면서 책임감에 마지못해 나갔음을 고백한다. 주일말씀으로 일주일 나를 버팅기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다음 한 주 동안 주님 말씀과 교제 안에서 더 신명 나게 더불어 살기 위해 그 모임에 되도록이면 빠지지 말고 꼭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주 갈 때마다 많이 주저하고 망설였음을 부끄럽지만 이 자리에서 고백한다.
난 공부하러 여기 왔어~하면서 다른 일들로 인해 공부시간이 줄어듬을 애달파한다. 그러면서 공부를 하나님 위에 많이 올려놓았음 또한 사실이다. 하나님 섬기면서 가장 힘든 점은 공부 때문이다.
하나님이냐, 공부냐?
둘 중에 누가 더 크고 중요하냐를 놓고 씨름하면서 항상 힘들어한다. 유학 나와서 힘든 것은 공부가 하기 싫고, 놀고 싶어서 힘든 것이 아니라, 때때로 하나님 위에 공부를 올려놓으면서까지 나 자신을 변명하는 현실을 주저 없이 내 눈으로 목격하기에 힘든 것 같다.
내게 가장 큰 우상, 공부!
Best 인 하나님을 위해서, Better 인 공부를 잠시 내려놓고 우선순위를 명백히 가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시대방향감각을 지닌, 맹꽁이 유학생이 아닌 자로 살고 싶다. 무엇보다, 하나님 한분만이 내 삶에 최우선순위가 되어, 시대방향감각 위에 더해진 영적분별력과 하나님의 눈으로, 내 비록 작은 몸은 숲에 있으되, 나무만 보는 좁고 협소한 내가 아니라 멀찌감치 한발 물러서서 커다란 숲 전체를 볼 줄 아는 영적 육적 시대통찰력을 지닌 나, 서재진이 되고 싶다.
추신: 겨울 연가에 너무 빠진 나머지, 배우 배용준 소속사에 이메일을 해서 겨울 연가를 이곳에서 찍으시면 어떻겠냐고 황당무계한 발언을 했다. 그때 나와 이메일을 했던 비서님께서 친히 사인을 받아서 우편으로 주신 엽서를 함께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