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넬버거가 코넬버거로?

by 서재진

제가 유학을 처음 결심한 날은 대학교 2학년 식품학 개론 첫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제 고정석 맨 앞자리 정중앙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노할머니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이미순 교수님께서 입가에 침이 하얗게 고인 체로 열정을 쏟아부으시며 첫 수업을 하셨습니다. 식품학 개론책이었던 ''Food Science''는 선생님의 은사님이셨던 코넬대학교 교수님이셨기에 선생님의 유학담이 자연스럽게 나왔지요.


우리나라 토플 1기 이셨던 선생님께서는 토플시험을 신청해 놓고 보니 Test Center 가 일본으로 나왔더랍니다. 그래서, 같이 토플시험 보는 분들끼리 힘을 모아 부랴부랴 Test Center를 한국으로 정하고 나서 시험을 보셨데요. 원서지원에 필요한 시험을 치르고 나서 코넬대학교에 박사과정을 지원하셨는데, 그곳에 계신 Dr. Elmer Edward Ewing 교수님께서 영어로 쓰인 선생님의 석사논문을 보시고 같이 연구해 보자고 제안하셨고 선생님께선 그때당시 외국인학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등록금 면제에 생활비까지 전부 지원되는 RA (Research Assitantship 연구보조 장학금)까지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셨습니다. 비행기 삯은 Full Bright 장학금을 받으셨기 때문에 선생님 자신의 돈은 십원한전 들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미국에 처음 도착한 선생님께서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비해서 8차선이 쭉쭉 뻗은 미국 워싱턴 공항이 별로 부럽지 않으셨데요. 단 한 가지 부러우셨던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 way of thinking 이셨다고 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위축이 들곤 하는데 반해 미국학생들은 무척 긍정적인 사고로 문제를 대했다고 하시며 예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자신들이 못 푸는 어려운 문제를 물어보면 "I don''t know..." 하고 뒷걸음을 치는 반면, 코넬 캠퍼스에서 만난 미국인 학생들은 대부분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I don''t know but I can figure it out and then I will teach you~!"


그날 전 맨 앞자리 나 홀로 정중앙에 앉아서 입가에 침이 고인 체 열강 하시는 교수님의 침세례를 고스란히 받으며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나도 유학가보고 싶다.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들하고 어깨를 나란히 겨누며 공부해보고 싶다. 정말 저들이 저렇게 생각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라고요. 내가 유학을 갈수만 있다면 잘은 모르지만 반드시 선생님 나오신 코넬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그날 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대학교 2학년때인 1995년 3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이로는 삼수, 횟수로는 재수한 제가, 그것도 여자대학 가정에 관련된 학과를 가면 내 손에 장을 짓는다고 호언장담하던 제가, 평생을 꿈꿔왔던 학문 수학과는 전혀 다른 식품영양학을 공부하며 대학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집안에서 막내 응석받이로 자랐기에 삼수생 노릇하며 언니라 불리는 것도 낯설었고, 나이 어린아이들과 어울리기도 싫었습니다. 구차하게 '' 이러저러해서 대학 들어오기 전에 나 많이 꿇었어...''라고 제 과거사를 꺼내기는 더더욱 싫었기에 학교 생활은 점점 겉으로만 빙빙 돌았습니다. 대학교 1학년때는 맨 앞줄에 앉아서 수업만 듣고 수업이 끝나면 교수님 뒤를 따라 뒤 한번 돌아보지 아니하고 앞문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우리 과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도록 학교 구내식당에서 밥을 사 먹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학과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부모님이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나이가 들어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일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은 일 중에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1994년 한 해를 지내고 나서 드는 생각은 정말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였습니다. 이렇게 살다 간 정말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내 인생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을 꽃다운 대학생활을 망치게 될 것 같아 1학년말 과감히 과대표를 지원해 과 일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인상적인 식품학 개론 수업을 받은 후에 저는 2학년 첫 학기 내내 수업시간 전후 교단 앞에 올라가 과에 관계된 일을 했습니다. 과비 걷는 일부터 시작해서 과에서 하는 행사에 적극 참여해 줄 것을 강조하며 강의바로 1분 전까지 마이크를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분주하게 강의실에서 과에 관계된 일을 하고 있는데 항상 5분 미리 오셔서 수업 준비를 하셨던 이미순 선생님께서 제게 물으셨습니다.


"재진아, 네가 다른 얘들보다 더 어려 보이는데 왜 언니니?"


고등학교 졸업하고, 전기대학 떨어지고, 지방 후기대 차점자 2순위로 겨우 턱걸이해서 대학이란 곳을 들어갔는데, 지방대 다니기 싫어서 학교 자퇴하고 학력고사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바뀐 입시제도라 나름대로 포부와 희망을 가지고 93년도에 재수를 했는데, 복수지원한 전기대학 3곳 모두 떨어지고, 후기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제 얘기를 들으시던 선생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참 포근하고 위로로 가득 찬 선생님의 눈빛은 이내 절 감싸 안고도 남았으니까요. 그런 짧은 대화가 오간 이후로 선생님께서는 저를 안쓰럽게 여기시며 참 많이 아끼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자주 우리 방에 들르거라~" 하셔서 선생님방을 아침저녁으로 드나들면서 멀리서나마 교수님 연구하시는 일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제 작은 꿈이 바로 연구실과 같은 아늑한 아지트에서 연구도 하고 학생들도 만나고 강의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제안은 제게 꿀처럼 달았습니다. 한 달간 선생님방을 들르면서 잦은 일들을 도맡아서 했습니다. 물론, 자진해서였지요. 복사하는 일, 잔 부름 하는 일, 커피잔 닦는 일 등등.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렇게나마 먼발치에서 선생님 하시는 일을 보고 또 도와드릴 수 있다는 것은 제게 큰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달이 지난 후에 선생님께서는 선생님 방 열쇠를 제게도 하나 주셨습니다. 석사를 하는 대학원 학생도 아니요, 일개 학부학생인 제게 열쇠를 맡기시는 선생님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침 일찍 새벽수영을 마치자마자 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주신 열쇠로 선생님 방문을 열자마자 제일 먼저 제가 한 일은 바로 시골에 계신 엄마한테 자랑스럽게 전화를 거는 거였습니다.


"엄마, 여기 어디게?"


"응, 어딘데?"


"어, 교수님 방이야~! 선생님께서 나한테도 열쇠를 주셔서 내가 아침 일찍 선생님 연구실 문을 열었지~"


"아이고, 우리 딸 장하다~ 우리 막둥이 장해~"


하셨습니다! 여름방학이면 다음 학기 선생님 강의준비하시는 것을 도왔습니다. 어느 해 여름엔 다음 학기 강의를 위해 슬라이드 찍는 기술을 전수받아 900개가 넘는 강의 슬라이드를 열이 많이 나는 커다란 두 개의 백열등 아래서 찍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댁으로 가시는데 저도 같이 따라나섰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원래 가방을 서너 개씩은 항상 들고 다니셨는데 그날따라 제 눈엔 선생님의 짐이 수도 많고 무거워 보였습니다. 버스정류장까지 선생님 짐을 들어 드리겠다고 함께 나서면서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정말이지 큰 영광이요 기쁨이었으니까요. 하루는 선생님과 함께 거닐면서 이렇게 여쭤보았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나오신 학교가 어디라고 하셨지요?"


저를 한번 지긋이 쳐다보시며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 코넬~"


"아, 네..."


교수님께 그것도 어린 대학생이 이렇게 여쭤보는 것이 버릇없다는 것도 모른 체 전 그렇게 선생님께서 젊음을 다 바쳐 공부하셨다던 학교가 궁금했습니다. 선생님 버스 타시는 곳까지 배웅해 드리고, 요기를 하러 학교 앞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집에 갔습니다. 메뉴판에 보니, 커넬버거가 있더군요. 저는 그때당시 코넬대학교 스펠링을 잘 몰랐기 때문에, 커넬버거가 코넬버거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 전공도 식품영양학이고, 코넬대학교에서 식품에 관련된 농대가 있다기에 이 햄버거가 코넬에서 만들어졌나 보다 했지요. 이 학교는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햄버거를 만들어 파는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옥수수 낱알을 kernel이라고 하데요. 커넬버거는 다름 아닌 옥수수 낱알이 알알이 박힌 버거였고요.


유학을 가게 되면 제가 무수히도 많이 떨어졌던 대학교한테 저도 뭔가 할 말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두 번씩이나 무참하게 거절당했던 모모재수학원한테까지도 제 구겨진 자존심과 젊은 날의 일그러진 영웅심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무너진 자존심의 회복이 제겐 바로 유학을 가는 목적이었습니다. 20살을 전후해서 무너진 자존심 서른을 전후해서 막판 뒤집기를 한번 해보자라는 오기가 발동해 시작한 유학인데, 주님은 이런 보잘것없는 오만한 저를 위해 은혜의 잔치를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추신: 2004년도 '복음과 상황' 9월호에 연재된 거꾸로 쓰는 유학일기입니다. 제 개인적인 신앙간증임을 밝혀둡니다. 매번, 긴 글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심 미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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